항목 ID | GC09200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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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邊應井 |
영어공식명칭 | Byeon Eungjeong |
이칭/별칭 | 문숙,충장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재영 |
출생 시기/일시 | 155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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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8년 - 변응정 무과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592년![]() |
추모 시기/일시 | 1592년 - 변응정 전라좌수사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647년 - 변응정 종용사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706년 - 변응정 시호 충장 추시 |
묘소|단소 | 변응정 묘 - 경기도 남양주시 이패동 산6 |
사당|배향지 | 금산 종용사 -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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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원주 |
대표 관직 | 해남현감 |
[정의]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조선 전기 무신.
[개설]
변응정이 임진왜란 중 전사한 정황에 대해 조선 후기부터 두 가지 설이 있음이 언급되었다. 『기재사초』, 『징비록』에는 변응정이 정담(鄭湛)과 함께 웅치(熊峙) 전투에서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 『국조보감』에는 홀로 금산성에서 싸우다가 사망하였다고 적고 있다. 『연려실기술』에서는 금산성에서 싸우다가 죽었다는 내용을 정리하면서 어떤 책에서는 웅치 전투에서 사망하였다고 적혀 있음을 명시하였다. 『연려실기술』에는 변응정의 전사를 둘러싼 두 가지 설에 관한 어떠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단순히 병렬적으로 기록하였다.
한편 신석겸(辛錫謙)은 『선묘중흥지』에서 변응정에 관한 두 가지 설을 고증하여 금산성에서 전사하였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웅치 전투의 전사자 기록이 상세함에도 불구하고 변응정이 언급되지 않은 점은 가장 의심 가는 부분으로 지적되었다. 무엇보다 묘표의 사망 일시를 볼 때 웅치 전투가 일어난 시점과 맞지 않고 조헌(趙憲)이 금산에서 전사한 시점과 가까운 점을 첫번째 근거로 제시하였다. 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은 모두 금산에서 전사한 인물인데 이 둘과 함께 변응정도 제향을 받고 있는 점도 금산에서 사망하였다는 근거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실록이나 보감이라는 공적 기록물에서 변응정이 사망한 곳을 금산으로 기록한 점은 명백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신석겸은 ‘모든 사가(史家)가 의심하는 것이므로 특별히 고증’하였음을 밝히며 변응정이 1592년 8월 금산에서 전사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가계]
본관은 원주이고, 자는 문숙(文淑)이다. 아버지에 관한 기록이 자료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난다. 『만력무자문무방목(萬曆戊子文武榜目)』에는 공조좌랑을 지낸 변열(邊悅)로 적혀 있으며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대장을 지낸 변협(邊恊)으로 확인된다.
[활동 사항]
1557년 출생하여 32세인 1588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 있었는데 호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조헌(趙憲)과 함께 금산을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변응정을 비롯한 관군들은 모두 약속한 기일에 늦게 되었으며, 조헌은 금산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오히려 야영지에서 기습을 받게 되었다. 조헌은 전투 중에 사망하였고 변응정은 이 소식을 듣고 의병장과 약속하고서 지키지 못하였고, 의병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함께 죽지 못하였음을 탄식하며 즉시 군사를 이끌고 단독으로 진군하여 금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전사하였다.
[묘소]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이패동 산6에 위치한다.
[상훈과 추모]
1592년 전라좌수사에 추증되었으며 1706년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았다. 1647년 금산에 건립된 종용사(從容祠)에 배향되었고,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에 변응정 사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