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5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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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澤 |
영어공식명칭 | Yun Taek |
이칭/별칭 | 중덕(仲德),율정(栗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문경호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에 거주한 고려 후기 문신.
[개설]
고려 후기에 활동한 문신으로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중덕(仲德)이며, 호는 율정(栗亭)이다. 1317년(충숙왕 4)에 과거에 급제하여 경산부사록(京山府司錄)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1339년(충숙왕 7)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서경판관(西京判官), 대언(代言)을 거쳐 정헌대부 국학대사성 문한사학(正獻大夫 國學大司成 文翰司學)을 역임하였다
[가계]
윤택은 국학대사성 문한사학(國學大司成 文翰司學)을 지낸 윤해(尹諧)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윤수평(尹守平)이다. 어머니는 진례군 부인 김씨[금산 김씨]이다. 고모부 윤선좌(尹宣佐)는 윤관(尹瓘)의 7세손으로 한양윤(漢陽尹), 계림윤(鷄林尹), 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역임하였다. 부인은 남평 문씨 문부(文富)의 딸이다. 아들은 윤구생(尹龜生)이며, 손자는 조선 초에 학문으로 이름을 떨친 윤소종(尹紹宗)이다.
[활동 사항]
윤택은 무송현(茂松縣)의 향리 가문에서 태어났다. 윤택의 증조할아버지 윤양비(尹良庇)는 무송현의 호장이었고, 할아버지 윤해(尹諧)도 무송의 향리였다가 과거로 관직에 나와 전민변정도감사(田民辨正都監使), 정헌대부 국학대사성 문한사학(正獻大夫 國學大司成 文翰司學) 등을 역임하였다.
윤택이 세 살 되던 해에 아버지 윤수평이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 윤해(尹諧)와 고모부인 윤선좌(尹宣佐)에게 학문을 익혔다. 1317년(충숙왕 4) 과거에 급제한 후 윤택은 연경으로 충숙왕을 찾아가 독대하였는데, 이때 충숙왕은 공민왕을 후사로 지목하고 그에게 뒷일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충숙왕의 바람과는 달리 충혜왕이 왕위를 잇게 되자 미움을 받아 관직에서 소외되었다가 충목왕 즉위 후 나주목사로 외직에 나갔다. 충목왕 사후 또다시 원에 공민왕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글을 올린 것이 알려져서 광양감무로 좌천되었다. 공민왕 즉위 후에 다시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개혁 정책을 건의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에서 물러나 충청남도 금산군에 기거하였다. 이후 다시 관직에 나갔다가 1361년(공민왕 10)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363년(공민왕 12)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듬해인 1364년(공민왕 13)에 금주(錦州)로 낙향하여 모친을 극진히 모시며 독서와 저술에 힘쓰다가 1370년(공민왕 19)에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우리나라의 학자로는 처음으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국왕에게 진강(進講)하였으며, 공민왕 대에는 왕명에 따라 『주서(周書)』 무일편(無逸篇)을 재상들에게 강의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이곡(李穀)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의 발문(跋文)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