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5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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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龜生 |
영어공식명칭 | Yun Gusae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문경호 |
묘소|단소 | 윤구생과 해주 최씨묘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산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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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무송(茂松) |
대표 관직|경력 | 판전농시사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에 거주한 고려 후기 문신.
[개설]
윤구생의 본관은 무송(茂松), 고려 말의 유학자 윤해(尹諧)의 증손이자 찬성사(贊成事) 윤택(尹澤)의 아들이다. 여러 관직을 거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올랐으며, 은퇴한 후 금주(錦州)[현재의 충청남도 금산군]에 살면서 효를 실천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이자 개혁론자인 윤소종(尹紹宗)의 아버지이다.
[가계]
윤구생의 가문인 무송 윤씨는 무송 지역에서 대대로 향리를 역임하였다. 증조할아버지 윤해의 대에 이르러 관직에 나간 후 할아버지 윤수평, 아버지 윤택 등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윤구생은 해주 최씨와 혼인하여 아들 창종(昌宗)·소종(紹宗)·회종(會宗)을 낳았다. 윤소종의 아들이 조선 전기의 학자인 윤회이다.
[활동 사항]
윤구생은 여러 관직을 거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역임하고 은퇴한 후 금주에 살면서,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따라 조상의 사당인 가묘를 짓고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를 지냈다. 고조와 증조, 조부모의 무덤에는 묘석(墓石)을 세워 기일을 적어두었으며, 부친의 묘에는 묘비를 세우고 묘의 남쪽에 재실(齋室)을 지어 추모하였다. 설과 중추절, 초하루와 보름에는 3대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동지에는 시조에게 제사 지냈으며, 입춘에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1391년(공양왕 3)에 전라도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노숭(盧嵩)이 윤구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조정에 글을 올려 정려와 효자비를 세우고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도록 건의하였다. 윤구생의 부인 해주 최씨 또한 효행이 뛰어나 선조들의 분묘 7기를 살뜰히 돌보면서, 제수를 정성껏 갖추어 제사지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시아버지 윤택이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노년을 보내면서 며느리를 볼 때마다 ‘나의 효부여, 나의 효부여’라고 하며 칭송하고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묘소]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산61번지에 윤구생과 부인 해주 최씨의 묘가 있다.
[상훈과 추모]
1391년(공양왕 3) 전라도도관찰사 노숭의 건의에 따라 정려와 효자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