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598
한자 尹紹宗
영어공식명칭 Yoon Sojong
이칭/별칭 헌숙(憲叔),동정(桐亭)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문경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45년연표보기 - 윤소종 출생
몰년 시기/일시 1393년 9월 17일연표보기 - 윤소종 사망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무송(茂松)
대표 관직|경력 성균관대사성

[정의]

충청남도 금산 출신의 고려 후기 문신.

[개설]

윤소종의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헌숙(憲叔), 호는 동정(桐亭). 할아버지는 찬성사 윤택(尹澤)이고, 아버지는 효자로 이름을 떨친 윤구생(尹龜生)이며, 어머니는 해주 최씨이다. 조선 초에 활약한 윤회(尹淮)가 아들이다.

[가계]

윤소종(尹紹宗)의 조상들은 대대로 본관인 무송에서 향리를 역임하였다. 고조부인 윤해가 관직에 나온 이후 증조할아버지 윤수평, 할아버지 윤택, 아버지 윤구생 등이 모두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갔다.

윤소종의 아들 윤회는 조선 전기 예문관제학, 대제학,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이색의 문인으로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급제하고, 1365년(공민왕 14) 예부시에서 장원급제하여 사관(史官)으로 선발되었다. 자리를 옮겨 정언(正言)이 된 후에는 행신(幸臣) 김흥경(金興慶)과 내시 김사행(金師幸)이 조정의 정치를 어지럽히니 그들을 처벌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상소가 올라가기도 전에 헌납(獻納) 김윤승(金允升)이 먼저 알고 사의(司議) 우현보(禹玄寶)와 함께 윤소종이 예전에 여러 달 동안 휴가를 내고 직책을 비웠다고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1379년(우왕 5)에 전교시승(典校寺丞)·전의부령(典儀副令)·예문응교 등을 역임하였으며, 1381년(우왕 7) 어머니 해주 최씨가 세상을 떠나자 금주(錦州)[금산]에서 3년 상을 치렀다. 1386년(우왕 12)에 성균사예(成均司藝)가 되었으며, 1388년(우왕 14)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돌아올 때 성문 밖에 나가 맞이하고 곽광전(霍光傳)을 바쳤다. 이 책은 전한 때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 곽광이라는 인물이 무제의 유조에 따라 소제의 통치를 돕고, 다음에 등극한 창읍왕(昌邑王)이 바른 정치를 펴지 못하자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세운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이후 전리총랑(典理摠郎),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거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이성계가 조준(趙浚) 등과 함께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과전법을 시행하려 할 때 정도전 등과 함께 동참하여 적극 협력하였다. 공양왕 때 대사헌 조준의 천거로 좌상시경연강독관(左常侍經筵講讀官)이 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다. 이때 공양왕이 중[僧] 찬영(粲英)을 맞아 와서 왕사(王師)로 삼으려 하였는데, 윤소종이 소(疏)를 올려 못하게 하였는데, 공양왕이 이에 불만을 품고 남을 비방한다는 이유로 금주(錦州)로 쫓아냈다. 관직에 복귀한 후 또다시 정몽주 일파의 간관에게 탄핵을 당해 정도전,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1392년(공양왕 4) 정몽주가 살해된 후에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병조전서(兵曹典書)의 관직을 받고 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수문관대제학(修文館大提學)을 지냈으며, 1393년(태조 2) 9월 17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태조실록』에 윤소종의 졸기가 남아있다. 졸기에 따르면 성품이 강개하고 큰 뜻이 있어 항상 왕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바로 잡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였으며, 정치의 잘잘못을 따질 때는 임금의 앞이라 하여 숨기는 법이 없었다고 하였다. 또한 집에 있을 때에도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고, 자주 양식이 떨어져도 개의치 않고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므로 성리학은 물론 경사에 조예가 깊었다고 하였다.

[학문과 저술]

경사(經史)에 두루 밝았으며, 왕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고,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시문집으로 『동정집(桐亭集)』8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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