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556
한자 龍江書院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용화로 258[용화리 34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영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16년연표보기 - 용강서원 건립
훼철|철거 시기/일시 1871년연표보기 - 용강서원 훼철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5월 17일연표보기 - 용강서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호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용강서원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현 소재지 용강서원 -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용화로 258[용화리 342]지도보기
성격 서원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용화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개설]

용강서원(龍江書院)은 금산군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해 노론계(老論系) 학자들의 배향과 강학 활동이 이어졌던 곳이다. 용강서원이 건립된 시기는 노론이 정계를 주도하던 때였고, 건립 당시 배향된 인물이 당시의 정계·학계를 주도하였던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 시남 유계(兪棨) 등이었던 것으로 보아도 금산 지역의 노론계 재지사족(在地士族)이 중심이 되어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유계는 병자호란 후 한동안 금산 지역에 머물며 학문을 닦았는데, 이것이 훗날 용강서원에 배향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유계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송준길, 송시열과는 동문의 관계였고, 훗날 죄를 얻어 면직되었을 때 양송(兩宋)의 추천으로 재등용되는 등 매우 밀접한 관계였으므로 3인이 나란히 병향된 것이다. 용강서원이 건립되던 해인 1716년(숙종 42) 11월 1일 봉안 시에 무주부사 이덕영과 금산군수 윤홍, 그리고 전 장수현감 김진망 및 인근 지역 노론계 재지사족이 총망라되어 참여하였다는 것을 보면, 금산 지역에서의 노론계 정치 사조와 용강서원의 입지를 짐작할 수 있다.

[위치]

용강서원금산군 제원면 용화리 342번지에 있다. 통영대전고속도로 금산IC에서 나와 금산군 제원면 방면으로 지방도 제601호선을 따라 3㎞ 정도 가면 제원의용소방대가 나온다. 제원의용소방대에서 우측 방향으로 1.5㎞ 진행하여, 삼거리에서 강변을 따라 용화 방면으로 1.5㎞를 더 가면 우측에 용강서원이 있다.

[변천]

1716년에 건립된 용강서원은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계기는 미호 김원행(金元行)역천 송명흠(宋明欽)의 강학 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김원행송명흠은 평소 친분이 있는 지기 사이였다. 1721년(경종 1)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의해 노론 4대신이었던 김원행의 할아버지 김창집이 사사되어, 김원행의 집은 용강서원과 가까운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에 유배되었다. 김원행은 가까이에 있는 용강서원에 출입하며 강학 활동을 하였다. 송명흠도 당시의 노론, 소론 간의 치열한 당쟁을 피해 아버지 묵옹 송요좌와 함께 옥천 지역에 살며 용강서원을 출입하게 되었다. 용강서원의 발전은 19세기 전반까지 계속되었다. 『청아록』[1819]에 의하면, 1819년(순조 19)에 유생이 가장 많아 75명이 수록되었고, 그 외의 시기에는 2명~3명에서 많아야 10명 안팎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용강서원의 위세는 상당히 약해졌고,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러나 당시 지역 유림 김조수의 노력으로 강당만은 유지하게 되어 명맥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이후 1910년(순종 4)경 지역 유림들이 훼철된 용강서원의 재목 일부를 모아 용강서당을 짓고, 유림의 회합 및 자제 교육의 장으로 이용하였다.

[현황]

용강서원은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현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용강서원에 관련한 인명을 기록해 놓은 자료로 『청금록(靑衿錄)』[1716], 『용강선안』[18세기 말], 『유생천거장』[1794], 『용강서원원장안』[1806], 『청아록』, 『용강서원도』[1836], 『재임안』[1866], 『용강서당유계록』[1885] 등이 있으며, 서원지는 전하지 않는다. 현재 용강서원은 강당만 남아 있으며, 서원의 본래 기능에서 벗어나 지역 유림의 집합소 역할을 하고 있다. 더불어 학생을 대상으로 한학을 가르치고 충효 교실을 여는 등 교육적 기능도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금산군에는 조선 후기 용강서원 이외에 성곡서원(星谷書院)산천재서원(山泉齋書院), 유곡서원, 반계서원 등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용강서원만이 유일하게 남아 조선 시대 성리학과 지역 교육 기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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