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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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元行 |
영어공식명칭 | Kim Wonhaeng |
이칭/별칭 | 미호,운루,백춘,문경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재영 |
출생 시기/일시 | 170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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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19년 - 김원행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722년 - 김원행 신임사화 이후 은거 |
몰년 시기/일시 | 1772년![]() |
추모 시기/일시 | 1805년 - 김원행 시호 문경 추시 |
추모 시기/일시 | 1857년 - 김원행 석실서원 배향 |
사당|배향지 | 용강서원 -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용화리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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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안동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에 거주하였던 조선 후기 학자.
[가계]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운루(雲樓)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이며, 생부는 김제겸(金濟謙)이다. 김창협(金昌協)의 아들인 종숙(從叔) 김숭겸(金崇謙)에게 입양되었다.
[활동 사항]
1702년 출생하여 종조부 김창흡(金昌翕)에게 학문을 배웠다. 1719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 김원행의 집안이 겪게 되는 풍파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게 되었다. 1721년 신축환국(辛丑換局)으로 김창집과 김제겸이 모두 유배되었고 이듬해 임인옥사(壬寅獄事)로 김창집은 사사되었으며 김제겸은 옥사하였다. 김원행은 이미 김숭겸에게 입양되어 형벌을 피하였다. 이후 김원행은 어머니 은진 송씨가 유배된 금산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금산에서 과거를 포기하고 『맹자』를 비롯하여 『우암집(尤庵集)』, 『율곡집(栗谷集)』 등을 읽는 데 전념하였고, 용강서원에서 강학 활동을 하였는데, 이때 송명흠도 역시 용강서원을 드나들면서 강학하였기 때문에 교유가 이루어졌다. 영조가 김창집을 복관시키고 여러 차례 산림직에 제수하였지만 나가지 않았다. 김원행은 청풍, 영평에서 거주하며 동문들과 학문을 닦았으며 미호(渼湖)로 이사한 후에는 주로 석실서원에서 강학 활동을 하였다. 1772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원행의 학문은 당대 성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경학(經學), 예학(禮學), 성리학(性理學) 분야를 두루 다루었다. 문집으로 20권 10책으로 구성된 『미호집(渼湖集)』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충청남도 금산군에 위치한 용강서원에 배향되었다. 1805년 문경(文敬) 시호를 받았으며 1857년 석실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