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4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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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錦山 新洞里 - |
이칭/별칭 | 금산 신동리 요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신동리 650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규완 |
소재지 | 금산 신동리 가마터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신동리 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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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가마터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신동리에 있는 조선 전기 가마터.
[개설]
가마는 토기와 도기, 자기, 기와, 벽돌 등을 굽기 위해 땅을 파거나 지붕을 덮어 씌워 만든 시설이며, 가마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가마터라고 한다.
[변천]
1872년(고종 9) 편찬된 「금산군지도(錦山郡地圖)」를 보면 ‘사기소(士基所)’라는 지명이 나타나며, 1914년 진산군과 금산군이 통합될 때까지 사기소가 확인된다. 사기소는 금산군 남일면 신동리에 있는 마을이다. 금산군 남일면의 신동리는 새로 생긴 마을로서 ‘새말’이라고도 하며, 그 이전에는 ‘옹기골’ 또는 ‘다래골’이라고 불렀다. 사기소는 ‘사구시’라고도 하는데, 조선 시대에 사기를 굽던 사기소가 자리하던 마을이므로 ‘사기소’라고 불렀다. 이처럼 금산군 남일면 신동리 일대에는 사기를 굽던 흔적이 지명에 남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금산군의 남쪽 남제원리에 도기소(陶器所)가 한 개 있는데 중품이 생산된다”고 하였다. 금산 신동리 가마는 낮은 온도에서 흙을 구워 내는 도기 생산지가 있던 곳이었다. 이와 달리 백자, 청자 등을 일컫는 자기소(磁器所)는 수질채리(水叱采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과 지명 외에 금산군 남일면 지역의 사기 생산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위치]
금산 신동리 가마터는 금산군 남일면 신동리 650번지에 있다. 금산군 남일면에 신동저수지가 있는데, 저수지 북서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곳에 사기소마을이 자리한다. 금산 신동리 가마터는 사기소마을의 북서쪽에 자리 잡은 웃터골의 정상부에 해당한다. 신정천 상류에 조성된 신동저수지의 남서안에 분포하며, 봉화산(烽火山)에서 북쪽으로 뻗은 능선의 말단부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가마가 존재하였음을 보여 주는 폐기장 1기가 확인되었으며 백자 발과 접시, 종자, 잔 등 일상 기명이 주로 확인되었다. 그중에서도 발과 접시의 비율이 92%였다. 출토된 유물로 보아 가마에서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요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유적에서 가마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다량의 상감 분청사기가 출토된 적석 유구(遺構)가 확인된 점, 그리고 주변 지형과 지명 등을 통해 봤을 때 금산 신동리 가마터 주변에 조선 시대 도자기 생산 유적이 폭넓게 분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금산 신동리 가마터 주변의 신동마을과 수천마을, 사기소마을은 봉황천(鳳凰川) 지류인 신동천을 따라 형성된 마을로서, 마을 주변 지역은 비교적 고지대가 많고 유역 경사면을 따라 인삼밭과 논 경작지가 발달해 있다. 금산 신동리 가마터 주변은 해발 200m~280m 내외로 비교적 고지대에 해당하며, 대부분의 지형은 급경사를 이루거나 자연적인 삭평과 도로 개설 등으로 인해 암반이 노출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금산 신동리 가마터를 통해 금산군 남일면 지역에 전국적으로 드물었던 중품의 사기를 제작하던 가마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