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4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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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澤 神道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규완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289년 - 윤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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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370년 - 윤택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581년![]() |
현 소재지 | 윤택 신도비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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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신도비 |
관련 인물 | 윤택(尹澤) |
크기(높이,너비,두께) | 155㎝[높이]|13㎝[너비]|75㎝[폭]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에 있는, 조선 전기에 건립한 윤택의 신도비.
[개설]
윤택 신도비(尹澤 神道碑)는 고려 후기에 학행과 효행으로 이름을 떨친 금산 지역 출신 문신 윤택(尹澤)[1289~1370]의 신도비(神道碑)이다. 윤택은 광양감무와 밀직제학(密直提學),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등을 지낸 인물로, 본관은 무송(茂松)이다. 국학대사성문한사학(國學大司成文翰司學)을 지낸 윤해(尹諧)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윤수평(尹守平)이다. 1317년(충숙왕 4)에 급제하였다. 연경에 있는 충숙왕(忠肅王)에게 공민왕(恭愍王)을 추대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공민왕이 왕위에 즉위해야 한다는 글을 원의 중서성(中書省)에 올렸으나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면서 광양감무로 좌천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고, 여러 정책에 대한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이때부터 외가가 있는 현재의 금산군에 기거한 것으로 보인다. 1364년(공민왕 13) 공식적으로 금주(錦州)[현 금산군]에 기거하며 7년을 보낸 뒤 1370년(공민왕 19) 9월에 사망하였다. 공민왕이 손수 초상인 진용(眞容)을 그리고 ‘율정(栗亭)’이라는 호를 써 주었다. 저서로 『율정집(栗亭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건립 경위]
윤택 신도비는 1581년(선조 14)에 건립하였다. 신도비의 내용은 이색(李穡)이 지었으며, 비문은 윤택의 문인인 신덕린(申德鄰)이 썼다.
[위치]
윤택 신도비는 금산군 남이면 성곡1리 지쟁이골에 있다. 성곡지에서 북쪽으로 287m 올라가면 세워져 있는 비석을 볼 수 있다. 윤택 신도비 우측에 윤택의 묘지명과 1986년 건립한 윤택의 아들 윤구생(尹龜生)의 효자비가 있다.
[형태]
비신의 높이는 155㎝, 너비는 13㎝, 폭은 75㎝이다.
[금석문]
비의 앞뒤에는 윤택의 행적이 새겨 있다. 비의 좌측에는 ‘율정선생 윤문정공신도비(栗亭先生 尹文貞公神道碑)’라고 새겨 있는데 ‘율정’은 윤택의 호이고, ‘문정’은 시호이므로 윤택의 신도비임을 알 수 있다. 비의 우측에는 신도비를 18대손 윤창선(尹昌善)과 19대손 윤병훈(尹炳訓)이 다시 세웠음을 기록하고 있다.
[현황]
윤택 신도비 근처에 신도비를 받쳤던 대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신도비는 현재 자리에서 50m 떨어진 곳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윤택의 묘지명은 1581년에 새겼으나 마모되어 1959년에 다시 새겼다.
[의의와 평가]
윤택 신도비는 금산군의 인물이자 고려 후기 지역의 유교적 질서 확충에 영향을 미쳤던 윤택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윤택의 활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