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4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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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敬命 先生 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양전리 522-1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규완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33년 - 고경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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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592년 - 고경명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656년![]()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40년![]() |
보수|복원 시기/일시 | 1952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5월 17일![]()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고경명선생비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
현 소재지 | 고경명선생비 -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양전리 5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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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비 |
관련 인물 | 고경명(高敬命)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양전리에 있는, 의병장 고경명을 기리는 조선 후기 비.
[개설]
고경명선생비(高敬命先生碑)는 임진왜란 당시 금산 전투(錦山 戰鬪)에 참전하였다가 사망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1533~1592]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고경명의 본관은 장흥(長興)으로 1533년(중종 28)에 태어났다. 1558년(명종 13)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동래부사(東萊府使)와 종부시(宗簿寺), 사섬시첨점(司贍寺僉正),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등을 지냈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으로 녹선(錄選)되었으나, 언관(言官)들이 정철(鄭澈)[1536~1593]을 논죄하면서 고경명이 정철의 추천을 받아 벼슬을 한 사람이라고 탄핵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은 아들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 이광, 전 나주부사(羅州府使)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다. 이후 담양부(潭陽府)에서 회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는데 고경명이 의병장으로 추대받았다. 고경명은 전주 지역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북상하다가 여산(礪山)에 이르러 손수 격문을 초안하여 돌리고 의병을 모았다. 은진에 진을 치고 있던 고경명은 왜군이 호남 지방으로 진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여 이를 방어하고자 하였다.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에게 서한을 보내 7월 10일 함께 형강을 건너 금산 지역의 왜적을 칠 것을 제의하였으나 그때까지 조헌은 도착하지 못하였다.
고경명은 금산 진산 지역에서 전주 지역으로 진군하던 왜병을 만나 싸웠고, 왜군은 금산성으로 후퇴하였다. 이에 고경명은 방어사 곽영, 영암군수 김성헌과 합류하여 고바야카와 다카라게의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첫 전투에서는 왜군 수천 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새벽에 왜군의 총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왜군은 먼저 관군을 공격하였고, 관군이 패하자 의병들도 동요하였다. 고경명은 죽음을 각오하고 앞장서서 의병들을 독려하며 싸웠다. 이 전투에서 고경명은 차남 고인후, 수하 장수인 유팽로, 안영, 김덕홍 등과 함께 싸우다 죽었다. 장남인 고종후도 시신을 처리한 뒤 다시 의병에 가담하여 김천일 등과 함께 진주 전투에서 싸우다 죽었다. 고경명의 죽음을 애통히 여긴 선조는 현재의 광주광역시 표충사와 금산군의 중용사 등에 사당을 세워 충절을 기리게 하였다.
[건립 경위]
1656년(효종 7) 고경명이 전사한 건너편 산기슭에 고경명선생비를 세웠다. 비문은 금산군수 여필관(呂必寬)이 지었다. 1940년에 일본 경찰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이후 비석 파편을 와가(瓦家) 비각(碑閣) 안에 정리하여 두었다. 1952년 후손들이 여필관의 비문을 다시 새겨 복원하였고, 1962년에 석조(石造) 비각(碑閣)을 건립하였다.
[위치]
고경명선생비는 금산군 금성면 양전리 522-15번지에 있다. 비가 있는 자리는 고경명이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곳이다.
[금석문]
‘제봉고선생순절지기(霽峰高先生殉節地記)’라는 글씨가 새겨 있다. ‘제봉’은 고경명의 호이며, 선생이 순절한 땅을 기록한다는 뜻이다.
[현황]
고경명선생비는 1984년 5월 17일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현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경명선생비는 고경명의 충절과 행적을 알 수 있는 비이다. 고경명의 의병군은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으나, 금산 전투로 인한 왜군의 사상자도 절반이 넘어 결국 후퇴하는 계기가 되었다. 금산 전투는 당시 호남 지방을 확보하여 전국을 회복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