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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411
한자 日帝 强占期
영어공식명칭 Japanese Occupation period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헌주

[정의]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식민 지배를 받았던 충청남도 금산 지역의 역사.

[개설]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직후인 1914년에 지방제도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현재의 충청남도 금산군의 행정구역이 완성되었다. 이후 일본은 통치 방식의 변화를 주었지만 조선인들에게 식민지라는 조건은 상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금산군민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금산군민들은 3·1운동을 통해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였고, 1920년대 문화통치기에는 각종 청년운동과 인격수양운동, 농총계몽운동 등의 신문화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역사적 배경]

일본은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韓日議定書]’을 강제하여 재정권과 외교권을 침해하였다. 1905년 11월에는 황제 고종과 정부 대신들을 협박하여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강압적으로 체결하였고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그 결과 전국적인 의병운동이 일어나는 등 대중적 저항에 직면하였고, 고종황제 또한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세계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는 등의 방식으로 저항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헤이그특사 파견을 빌미 삼아 고종을 퇴위시켰고, 의병운동에 대한 탄압을 전방위적으로 진행하였다. 결국 1910년 8월에 일본은 대한제국의 강제 병합을 완료하였다.

[일제의 식민 지배정책]

일본은 강제 병합 이후 지방제도의 개편도 단행하였다. 먼저 조선총독부 관제와 지방 관제를 개편하였고, 1914년 부(府)·군(郡)·면(面) 폐합 조치를 하면서 진산군(珍山郡)을 금산군(錦山郡)에 통합하였다. 그리고 충청남도 금산군 부남면(富南面)을 무주군(茂朱郡)에 소속시켰고, 진산군 7개면과 금산군 14개면을 폐합하여 10개 면으로 개편하였다. 금산군진산군의 경계였던 송원치(松院峙)에서 1914년 3월에 행정구역 병합 절차를 거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이 진행했던 통치 방식은 헌병이 경찰과 행정을 겸임하고 즉결처분을 통해 조선인들을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무단통치였다. 무단통치에 억눌렸던 조선인들의 불만이 1919년 3·1운동으로 터져나오자, 일제는 무단통치를 폐기하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실시하면서 조선인에게 근대적 교육도 실시하였다.

[금산 지역의 항일운동]

조선인들은 이러한 일본의 억압적 통치에 저항했다. 우선 1910년대 무단통치 하에서 조선인들은 저항운동을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3·1운동이었다. 충청남도 금산군의 3·1운동은 3월 하순경부터 일어났다. 그 중에도 금산면의 청년 김용술·임승환 등은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3·1운동과 호응하여 충청남도 금산군에서도 일제히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고, 3월 23일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3월 23일 오전 구호열변희조 등은 금산읍 장날을 맞아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격문을 배포하였고, 오후 2시경 김용술·임승환 등은 20여 명의 청년과 함께 우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자 주위의 군중이 호응하여 시위대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에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헌병분대의 긴급 출동으로 주동자들이 체포되었고 시위 군중들은 일시 해산하였다. 그리고 밤 10시 경에 다시 30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했으나 헌병의 출동으로 해산하였다. 3월 25일에는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동쪽에 있는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제원리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제원리박영규는 3월 25일 저녁에 ‘한국독립만세’라고 쓴 태극기를 들고 사람들을 규합하였고 박영규와 주민들은 26일에도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에서는 3월 28일에도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는데, 밤 10시경에는 서대산(西臺山)에 봉화를 올렸고, 군내 각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한편 진산에서도 3월 26일 방축리 장날에 하홍학(河弘學) 등 50여 명의 청년이 주도하여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3월 31일에 복수면 곡남리에서도 김영호정재철 등이 주도한 만세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재철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도로공사에 나와 있었던 수영리 주민 약 2백 명이 모두 동참하였다. 아울러 곡남리유영준 등을 비롯한 군중들은 미리 준비해 온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당시 도로공사를 감독하러 나왔던 헌병이 이를 제지하려 하였지만, 김영호·오연구 등은 환호성을 올리며 만세의 대열을 지휘하였고 만세시위는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후 헌병들의 진압이 계속 되었지만 밤 11시경까지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의 가두행진은 계속되었다.

문화통치 실시 이후 조선의 각 지방에는 근대식 학교 교육을 통해 신지식을 수용한 지역 청년들에 의해 각종 청년운동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청년들은 군이나 면 혹은 동리 단위로 청년수양단체를 결성한 뒤 야학·생활 개선 등과 같은 민중계몽 활동과 강연회·토론회·연극회·체육회 등과 같은 정치문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에 활성화된 이러한 각종 인격수양운동·품성도야운동·농촌계몽운동 등은 일종의 신문화운동이었다. 충청남도 금산군에서도 금산청년회, 금산기독청년면려회, 복수청년회, 금산청년동맹 등의 단체들이 지역민의 계몽과 관련된 각종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금산청년회는 1920년 7월 10일에 금산 청년들의 발기로 창립되었다. 출범 당시 회원은 수백 명에 달하였다. 1922년 5월에는 금산청년회관이 준공되었고 신축낙성식도 거행하였다. 이후 강연회, 운동회를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1932년 4월 『중앙일보』 기사에 금산청년회 관련 기록을 마지막으로 이후의 활동상은 보이지 않는다.

금산기독청년면려회는 1920년대에 창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25년 5월에는 여자수예강습소를 설립하였고 제조품 교수 강습회를 열었으며, 1933년 7월에 열린 제5회 정기총회에서는 농촌사업확장, 절제운동, 전도사업, 여름학교와 문자보급 건 등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복수청년회는 1926년 2월에 금산군 복수면의 지방 유지들이 발기하여 창설된 단체였다. 1926년 3월에 2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규약 개정과 예산 등을 결의하였다. 집행위원은 정운호, 송인순, 이규희 등이었으며, 상무위원은 조희수와 이정섭 등이었다.

금산청년동맹은 1928년 2월 4일 창립되었다. 1928년 2월 20일 금산청년동맹 군북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고, 2월 25일에는 금산군 추부면에도 지부를 설치할 것을 논의하였다. 1929년 2월에는 ‘금산청년동맹 1주년 기념식’을 열기도 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 당국의 탄압 등으로 위기를 맞았으며 1933년 이후의 활동 기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엄혹한 식민지 시기에서도 금산 지역의 청년들이 자발적이며 능동적인 체육, 문화활동을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억압적 통치에 맞서 충청남도 금산군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고 문화운동도 전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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