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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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私立錦新學校 |
이칭/별칭 | 금신학교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범 |
개교 시기/일시 | 1907년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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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1911년![]() |
최초 설립지 | 사립금신학교 -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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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근대 사립 학교 |
[정의]
개항기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에 있었던 사립 학교.
[변천]
개항기, 현재의 충청남도 금산군에 공립 소학교가 설립되지 못한 가운데 김진현과 박승현, 박태서, 김제룡 등이 발기하여 1907년(순종 1) 3월 최초의 신식 학교인 사립금신학교(私立錦新學校)를 설립하였다. 학교 운영은 순조롭지 못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08년(순종2) 4월 금산군수 김우식이 「사립금신학교취지서」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내용을 간추리면, 자신이 군수로 부임하면서 학교의 진흥 여부를 물으니 의병 투쟁과 재정 궁핍으로 학교가 폐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금산군은 애국심을 발휘할 만한 인재를 배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으니 이미 설립한 학교를 1년도 안 되어 폐교할 수는 없다고 김우식은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교무를 유지할 방안을 생각해 보건데, 재정 준비가 필수적이라 자신의 월급으로는 부족하여 재산을 털어 50환을 학교에 기부하게 되었다고 한다. 더불어 학문을 좋아하는 이들도 함께 학교를 돕는다면 다행이라고 하였다. 사립금신학교의 기부에 동참해 달라는 의미였다.
김우식의 노력과 주사 김재훈의 노력으로 다시 학교를 일으켜 1909년(순종 3) 1월에 학생이 60여 명이 되었고, 갑·을·병 3개 반으로 운영하였다. 동년 7월부터는 정부에서 매월 5환씩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 1910년에는 1학년이 42명, 2학년이 17명, 3학년이 8명이었으며, 같은 해 제1회 졸업생 6명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강제 병합되면서 1911년 사립금신학교는 공립금산보통학교로 전환되었다.
[교육 활동]
설립 당시 수업 연한은 3년제였고, 학과목은 수신과 국어, 한문, 일본어, 산수 등이었다. 학생 연령은 20세 이상인 자가 많았는데 대체로 사숙이나 서당에서 한문을 익힌 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