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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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代 敎育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범 |
[정의]
개항부터 1945년 8·15광복 이전까지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서 이루어진 근대식 교육.
[개설]
개항기 금산 지역에는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근대적인 사립 교육 기관이 다수 설립되었다. 일제 강점기 초기 금산 지역의 교육은 무단 정치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일제 강점기 중기에는 사립 학교와 보통학교가 많았다. 일제 강점기 말기 금산 지역의 교육은 황민화 교육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개항기 금산의 교육 현황]
개항기 금산 지역에서는 신문화 수용과 신학제의 제정 과정에 발맞추어, 종교 단체의 교육 활동과 민간 교육 운동이 사립 학교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근대 학제의 확립과 민족 교육 정립의 추세에 따라 서당 교육 못지않게 근대 학교가 등장하였다. 학생 수는 서당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근대 학교의 설립으로 서당 교육에서 점차 학교 교육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개화기는 근대 금산 교육의 성립기라고 할 수 있다. 1905년(고종 42) 「소학교령」이 공포되고 1906년(고종 43) 「보통학교령」이 시행되자, 금산 지역에도 근대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1907년 3월 금산읍 상옥리의 사립금산학교를 시작으로 1908년 2월 금산읍에 사립기독심광학교가, 1909년에 사립명성학교가 설립되었고, 1909년에는 제원면에 사립제남학교가, 금성면에 경인사숙이, 진산면에 사립취영학교와 사립육영학교가 각각 설립되었다. 사립기독심광학교와 사립육영학교는 기독교 장로 계열의 학교였으며, 사립취영학교는 진산향교(珍山鄕校)가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당시 금산군에는 5개 학교가, 진산군에는 2개 학교가 있었는데, 사립명성학교와 사립제남학교, 경인사숙은 1년, 2년 사이에 재정난으로 운영이 중단되었으며, 이후 4개 학교만 남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초기 금산의 교육]
「조선교육령」 제정 당시 교육령에 의한 학제는 보통학교가 4년, 고등 보통학교가 4년, 여자 고등 보통학교가 3년이었다. 이 시기는 제도상으로 조선인과 일본인 차별이 매우 심하였다. 당시 개설된 교육 기관은 금산에 4개소, 진산과 추부, 제원에 각 1개소가 있었다. 먼저 금산의 학교로, 1911년 9월에 사립금신학교를 공립으로 개편하여 금산간이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1913년 6월에는 금산간이공립농업학교가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금산보통학교 내에 세워졌으나 1917년에 금산읍 상리로 이전하였고, 1921년에 폐교되었다. 금산수산강습소는 1917년에 폐교되었다. 1910년 6월에 설립된 금산공립심상소학교는 일본인 학교로서 유일하였다. 진산에는 1912년 5월에 사립진산학교를 공립으로 개편한 진산공립보통학교가 있었고, 추부와 제원에는 모두 1917년 4월에 설립된 사립 학교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중기 금산의 교육]
이 시기의 사립 학교로 금산에 금산청년회와 육성학교가 있었고, 부리에는 사립부리학교가, 남이에는 사립남이학교가, 군북에는 사립군북학교가, 남일에는 사립남일학교가 있었다. 복수와 금성에는 강습소가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에 보통학교로 전환되었다. 공립 보통학교로는 1919년 4월에 추부공립보통학교가, 1921년 4월에 제원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였고, 1924년 4월에는 부리공립보통학교가, 1925년 6월에는 남이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였다. 또 1929년 4월에는 남일공립보통학교와 복수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였고, 1931년 4월에 군북공립보통학교가, 1933년 4월에 금성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였다. 복수공립보통학교와 금성공립보통학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립 학교를 공립으로 개편하여 설립한 것이다. 추부공립보통학교와 제원공립보통학교는 각각 여학생을 1928년과 1930년에 수용하였다.
간이 학교로는 추부면의 성대간이학교와 복수면의 신대간이학교, 남이면의 건천간이학교, 부리면의 신도간이학교, 군북면의 상곡간이학교, 남이면의 석동간이학교가 있었다. 이들 학교는 1940년대~1950년대에 모두 국민학교로 개편되었다. 이외에 일본인 소학교로 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가 있었고, 1933년에 설립된 금산공립농업실수학교가 있었다. 1932년에 사립금산유치원이 있었으나 1942년에 폐원되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 금산의 교육]
「조선교육령」 3차 개정과 4차 개정을 통해 학교 명칭이 소학교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1941년에 다시 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1945년 4월, 금산공립농업학교[현 금산산업고등학교]가 설립되어 처음으로 정식 중등 교육 기관이 들어섰다. 이 기간에 신설된 학교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한편, 초등 교육 기관 취학자 수는 1935년 일제 중기 말에 2,600명에서 1945년에 8,000명으로 급증하였다. 이는 징병제가 실시되자 의무 교육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취학 희망자 전원을 수용한 지방민의 교육에 대한 인식에 기인한 것이었다. 1943년에는 한국인 학교인 금산중앙국민학교에 2년제 고등과가 병설되었는데, 철저한 황민화 교육을 위하여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였다. 금산 지방에서도 사당과 비석을 제거하고 사립기독심광학교를 공립 학교로 폐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