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3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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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債報償運動 |
영어공식명칭 | The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범 |
[정의]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서 1907년 3월에 전개된 국권 회복 운동.
[개설]
국채보상운동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이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차관 1,300만원을 갚지 못하여 국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한 국민들이 자발적인 모금을 통해 일본에 대한 경제적 종속을 저지하려고 했던 운동이었다.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서는 1907년 3월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역사적 배경]
국채보상운동은 을사늑약 이후 나타난 국권 회복 운동의 하나로 범국민적 운동이었다. 1907년 1월 부산에서 처음 논의되었으며 이후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 대동광문회 회장 박해령 등의 이름으로 격문이 발송되면서 전국화되었다. 이후 여러 단체의 모금운동이 신문을 통해 전개되었다. 운동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산에서도 움직임이 일어났다. 1907년 3월 초에 금산군 유생들을 중심으로 13명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자는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관련기록]
1907년 3월 18일, 발기인 고제학과 박항래 등 13인의 이름으로 취지서가 발표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알리노니 지금 우리 나라 국채 보상 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고 의연금 내는 동포들이 마치 훗날이 없을까 두려워하듯 하니 가히 우리 대동이 진보하는 바탕이러라. 대저 토지가 있으면 인민이 있으니 토지가 아니면 인민이 그 어찌 거주하며 인민이 아니면 토지를 장차 어디에 쓸고. 토지와 인민을 모두 쓸 수 없으면 천만금 저금도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만일 이 거액의 차관을 1년, 2년, 또는 10년, 20년 걸릴지라도 깨끗이 갚지 않으면 그 이자가 어찌 1천 3백만원에만 그치겠는가. 그런즉 국가에 크게 관계될 뿐 아니라 개개인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인즉 어찌 힘쓰지 않으며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단연 동맹이나 애국 혈성에 어찌 의연금의 다소에 구애되겠는가. 우리 금산군 모두는 각면 각동에 설명하여 이 일이 급히 서둘지 않으면 안되는 일임을 알리고 나라를 지키는 붉은 정성으로 그 역량을 다 기울이고 티끌모아 태산이 된다는 뜻으로 의연금을 내어 1천3백만분의 1이라도 보태면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함. 보상금 수집 방식은 다음과 같음.
-보상 방침은 일반 동포의 의연금을 모집하되 액수에 구애되지 않음
-의연금 낸 모든 이의 씨명을 매월 말 신문에 게재함.
-이 동맹은 대소민인 남녀노소 모두 참여할 수 있음.”
[경과]
발기인 명단을 보면, 금산군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고제학과 박항래 같이 10여 년전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민보군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과 싸웠던 인물들이 주축이 되었다. 금산군민들은 취지서에 응하여 1908년 3월 국채보상운동의 열기가 줄어들 때까지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에 따라 총 303환, 엽전으로 3,039냥의 거액을 모금하였다. 금산군의 국채보상운동 참여자 명단을 보면 유생은 물론, 전임 주사, 각종 위원, 수서기 등의 아전 뿐만 아니라, 보부상 집단 100여 명도 참여하였다. 진산군에서는 따로 취지서를 발표하여 남기지 않았으나 진산군주사 유석희가 자신이 운영하는 사숙 및 문중을 중심으로 의연금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결과]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으려 했던 유례없는 경제적 운동이었으나, 상위 계층과 부자들의 참여가 부족했다는 한계점이 있었다. 또한 일제가 일진회를 조종하여 활동을 방해하고, 주도자인 양기탁을 구속하는 등 국채보상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조치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한 결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금산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은 금산 지역의 유지 및 아전, 보부상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국권 회복 운동이 금산에서 대중운동으로 확산하는데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