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364
한자 梨峙 大捷
영어공식명칭 The Great Victory of Ichi
이칭/별칭 이치전투,이치싸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규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권율

[정의]

임진왜란 때 충청남도 금산군의 이치(梨峙)에서 벌어진 왜군과 조선군의 전투.

[개설]

임진왜란 시기 금산군을 거쳐 전라도로 침입하려는 왜군을 금산의 이치(梨峙)에서 권율이 맞서 싸워 이긴 전투이다. 이치 전투의 승리를 통해 일본군이 육지를 통해 곡창지대이자 병력의 공급원이 될 전라도 지역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역사적 배경]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개성을 점령한 후, 한양에서 회의를 열어 조선 전역을 점령하기 위해 각 부대를 파견하고자 하였다. 9개 군으로 편성된 왜군 중 제6군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휘하의 군대가 전라도를 맡게 되어 진군하였다. 고바야카와의 별동대를 이끌었던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恵瓊]는 전라도 공략의 선봉을 맡아 스스로 전라감사(全羅監司)라고 칭하면서 남원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암진전투(鼎巖津戰鬪)에서 곽재우(郭再祐)가 이끈 의병에게 패하고 물러났다. 이들은 서울의 본진과 합세하여 다시 전라도로 칩입하기 위하여 거창→황간→무주를 거쳐 금산에 침입하였다.

[경과]

전라도로 진입하려는 왜구는 영동(永同)에서 금산의 제원(濟原)에 이르렀다. 이때 금산군수는 권종(權悰)이었다. 권종은 1592년 3월에 금산군수로 부임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 있던 사촌동생인 권율(權慄)과 서로 연락하여 국난에 대처할 것을 기약하였다. 왜적이 금산군에 이르자 권종은 2백 명이 안 되는 병졸(兵卒)과 약간의 역졸(驛卒)을 거느리고 있던 제원찰방(濟原察訪) 이극경(李克絅)과 합세하여 저곡산(猪谷山)에 진을 치고 방어하였다. 이 전투로 권종이 전사하고, 금산성은 왜군에게 점령당하였다. 얀코쿠지의 왜군은 전주를 점령하기 위해 금산에서 우회하여 진안의 웅치(熊峙)를 통하여 진입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이치(梨峙)를 넘어 전주를 침입하고자 하였다. 왜군이 이치를 통해 전주를 공격하려고 진격하자 이를 막은 것이 권율(權慄)이었다. 전라도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 권율은 1천여 명의 관군과 의병의 연합군으로 남하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이치에 방어진을 치고 대기하였다. 7월 8일 제6군의 주력부대가 이치를 침입하자 권율이 이를 격퇴하였고, 왜군은 금산성으로 후퇴하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을 패퇴시켜 이치대첩(梨峙大捷)이라고도 부른다. 권율은 “이치싸움이 최고이고, 행주는 그 다음이다.”라고 할 만큼 이 전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결과]

금산에서 왜군을 격퇴하여 곡창지대이자 병력의 공급원이 될 전라도 지역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고, 상대적으로 왜군에게 타격을 주어 임진왜란의 국면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치대첩은 왜군으로부터 곡창 지대이자 병력의 공급원인 전라도를 방어하기 위해 관군, 의병, 승병이 합세한 총체적 저항이었다. 『선조수정실록』에 웅치전투와 나란히 실려 있어 7월 8일 동시에 벌어진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여러 정황으로 볼때 같은 날 벌어진 전투로 보기는 어렵다.

[관련 유적]

이치대첩에서 큰 전공을 세워 주부(主簿)의 벼슬을 받고 이후 행주산성에서 전사한 조여충(趙汝忠)의 묘[금성면 의총1리 원의총]가 있고,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권율장군(權慄將軍) 이치대첩비(梨峙大捷碑)[진산면 묵산1리 산79-34 작은복수골]와 이치대첩을 기념하고 충혼을 모신 사당인 대첩사지(大捷祠址)[금성면 상가리 쇠실]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