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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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현대/현대 |
집필자 | 백현덕 |
[정의]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순교자가 발생한 진산사건이 일어난 곳이며, 100년 복음의 역사를 가지며 기독교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한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살펴보기.
[개설]
진산 지역 출신 순교자는 1791년 신해박해의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외에 1801년 신유박해에 윤지헌 프란치스코 외 6명, 1839년 기해박해에 오종례 야고보 외 2명, 1866년 병인박해에 김영오 아오스딩 외 20명이 있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한 시복식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는 복자의 반열에 올랐다. 진산성지에서는 매년 그분들의 정신을 기억하며 순교자 현양미사를 봉헌한다.
[금산지역 천주교의 전래]
조선 후기, 천주교가 이 땅에 전해질 때에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들은 남인 계통의 양반들이었다. 그들은 학통뿐만 아니라 혈연과 지연으로 연결되어 그들에 의해 복음이 받아들여지고 확산되었다. 또한 처음에 복음이 전해진 지역은 서울 지역, 경기도의 양근 지역, 충청도의 내포 지역, 그리고 전주 이북의 호남 지역 등 몇 곳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금산 지역에 제일 먼저 천주교가 전해진 곳은 진산이었고, 진산 장구동에서 출생한 윤지충 바오로가 사도의 역할을 하면서 천주교가 주변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윤지충은 다른 지역에서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이승훈 베드로 및 정약용 요한 형제들과 인척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학문적 교류도 있었기에 일찍 입교할 수 있었다. 윤지충은 1784년 무렵 고종사촌 정약전의 집에 갔다가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천주실의」, 「칠극」을 빌려 고향에 돌아와 3년 동안 탐독했고 부족한 내용은 정약전에게 가르침을 받아 1787년에 이승훈으로부터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받았다.
진산의 첫 신자가 된 윤지충은 어머니 권씨와 동생 윤지헌 프란치스코, 외사촌 형 권상연 야고보 등 가족과 친지는 물론 동네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 그 외 많은 이들이 윤지충에게 가르침을 받아 입교하였는데, 전라도 고창군 무장의 최여겸 마티아, 충청도 홍주의 한덕운 토마스, 전라도 무산의 양언주와 무안의 고시윤 등이 꼽힌다.
형에게 교리를 배워 1789년에 입교한 윤지헌은 가족들과 진산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복음 선포자가 되어 논산 은진 사람 이채운에게 교리를 가르쳐주었다. 1791년에 제사 문제로 형이 순교하자 고산으로 피신하여 신앙공동체를 이끌어가며 많은 이들을 입교시켰다.
윤지충과 같은 마을에 살던 권상연은 윤지충이 빌려온 「천주실의」와 「칠극」을 빌려보며 교리를 익혔고, 1787년에 ‘호남의 사도’로 불리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에게 ‘야고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권상연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지만, 진산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 충실히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은 윤지충과 함께한 순교 행적에서 잘 드러난다.
[진산사건]
진산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피의 증거자가 발생한 곳이다.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수용하여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조선 천주교회는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조선 정부와 조상 제사 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마침내 첫 순교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진산사건 혹은 신해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은 윤지충이 자라고 복음의 씨를 뿌린 진산면 지방리[또는 막현리] 일대에서 발생하였다.
윤지충은 어려서부터 지능과 품행이 뛰어났고 오래지 않아 재주있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1783년 25세때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다음 해 겨울 윤지충은 서울에 있는 김범우 토마스 집에서 천주교 서적 두 권[「천주실의」와 「칠극」]을 발견하고 그 책들을 빌려와 베꼈다. 그 후 약 3년이 지나고 정약전으로 부터 천주교 전체를 배우고 나서 천주교를 신봉하고 열심히 수계하였다. 후에 천주교가 금지된 사실을 알게 되자 자기 책의 일부를 불태웠다. 그러나 천주교에 충성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을 중지하지 않았다. 1790년에 죽은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고 절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북경 주교의 편지 내용을 알고 있었고 집안에 보존되어 오는 두 세대의 신주들을 불살랐다.
1791년 5월,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가 사망하였다. 평소에 ‘자신이 죽으면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지내거나 신주를 모시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윤지충은 외사촌 권상연과 상의하여 그대로 따랐다. 윤지충은 정중하게 상례를 갖추었으나 유교의 제사에서 중시하던 신주를 모시지 않고 음식도 차리지 않았다. 이 소문이 퍼지자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도저히 받아들여 질 수 없는 패륜에 대하여 당색에 관계없이 전국에서 이들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윤지충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광주에 가 있었으나 군수의 체포령을 듣고 1791년 음력 10월 26일 스스로 자수하였다.
당시에 진산은 전라도 땅이었다. 따라서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을 거쳐 전라도 감영이 있는 전주로 압송되었다. 윤지충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장례를 치렀으므로 효의 본분을 다하였다고 항변하였고, 한번 아버지로 모신 천주를 결코 배반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조사 결과를 받은 당시 좌의정 채제공은 그들을 참수에 처하고 5일간 효시하라는 명을 내려 백성들에게 경계심을 주라고 정조에게 결단을 촉구하였다. 정조는 천주교를 규탄해야 한다는 신료들의 끈질긴 의견에 동의하고 사형 지시를 내리게 되어 판결문은 즉시 발송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조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긴급명령을 내려 처형을 유예시키기 위해 특사를 파견하였지만 이미 먼저 내려진 명령이 집행된 뒤였다.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주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윤지충의 나이 33세, 권상연의 나이 41세였다. 이는 조선 천주교회가 설립된 이래 공식적으로 판결을 받아 순교한 첫 사례였다. 두 순교자의 시신은 고향에서 가까운 막현리 일대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었다. 1795년 4월 어느 날 중국에서 파견된 주문모 신부가 전라도 교회를 방문할 때에 신부를 안내하던 유관검과 이존창은 마침 윤지충과 권상연의 무덤 아래를 지나게 되었다고 한다. 유관검은 주 신부에게 무덤을 가리키며 “이 무덤은 우리 나라 신도들 중에서 고명한 사람의 무덤이다”라고 소개하였다. 그러자 주 신부는 “훗날 조선에 천주교가 크게 행해지면 이 두 사람의 무덤 위에 천주당을 건립해야 함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한다. 하지만 두 순교자의 무덤은 오랜 박해를 받으면서 실전되어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21년 3월 11일에 완주 초남이 성지[유항검 복자] 바우배기 일대[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169-17]를 성역화하는 과정에서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으로 추정되는 묘와 유해가 발견되었다. 묘에서는 각자의 인적 사항이 적힌 백자사발지석도 출토되었다. 지석의 기록은 세 복자의 인적사항과 일치하였다. 전주교구는 유해의 진정성 확인을 위해 6개월에 걸쳐 고고학적, 해부학적 조사를 진행한 후, 2021년 9월 1일에 성해(聖骸) 진정성의 교령(敎令)을 선포하였다. 2023년 3월 진산성지 기념 성당이 새롭게 신축되었으며 2023년 5월 27일 새 성당 봉헌식과 함께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의 유골이 232년 만에 신앙의 못자리로 돌아와 안치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된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하여 시복되었다.
[한국 최초의 순교를 기리다.- 진산성지]
조선 시대의 진산은 전라도에 속한 군(郡)이었으나 진산사건을 계기로 1791년부터 5년간 현(縣)으로 강등되었고, 진산군수 신사원도 유배를 당하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제사거부가 삼강오륜을 저버린 강상죄에 해당되기 때문에 지역 전체가 연좌의 벌을 받았다. 이후 진산에 살던 천주교 신자들은 산속에 숨어들어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 등 신앙의 역사를 이어갔다. 1796년 다시 군으로 회복된 진산은 이후 그 지위를 유지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금산군에 병합되어 현재의 진산면이 되었다. 1886년 조불조약 이후 선교사들의 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진산 지방리에 가새벌 공소가 세워졌다. 1927년 가새벌 공소의 이의규 회장이 현재의 진산성지가 있는 땅을 기증하였고 그곳으로 공소를 옮겨 성당을 건립하였다. 한국 천주교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복자품에 올렸고 대전교구 천주교 유지재단에서는 한국 최초의 순교사건이 발생한 정확한 장소는 모르기에 1866년 병인박해 이전부터 있어온 진산 가새벌 교우촌의 후신인 지방리 공소를 그 기념지로 선택하여 진산성지로 승격하였다. 천주교 진산성지성당은 그 역사성과 건축적인 희소성이 인정되어 현재 등록문화재 제 682호로 등록되었다. 주변에는 진산성지를 기리는 진산역사문화관을 건립하여 진산사건과 진산의 역사와 문화를 잘 전달해 주고 있다.
[100년 역사의 금산 개신교 교회]
한국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는 독일 출신 목사이며 선교사인 카를 귀츨라프(K. F. A. Guetzlaff)[한국이름 곽실엽]로, 1832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무장 상선 로드 앰허스트호의 통역관으로 충남 보령시 고대도에 25일 동안 정박해 있으며 한문 성경을 조선인에게 전해 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1866년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가 미국 국적의 제너럴셔먼호에서 죽임을 당해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항으로 입국함으로써 본격적인 한국 개신교의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금산 지역은 1903년 5월 경 해리슨 선교사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노방전도와 시장전도를 했고, 전도책자를 팔며 보급하였다. 해리슨 선교사는 몸이 아플 정도로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다. 이것은 금산 지역에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서 해리슨 선교사의 전도 여행은 금산 개신교의 초석을 다지는 순례였다.
1905년 금산읍 최초 수세자 리경필이 금산읍교회를 설립했다. 리경필이 다른 7명과 함께 루터 맥쿠첸에게 학습을 받고, 1906년 세례교인이 됨으로써 금산읍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이 금산읍교회는 현재 금산 지역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지고 있는 금산제일장로교회의 모체가 된다. 리경필은 그해부터 금산읍교회의 영수로 일하게 되는데, 1907년 12월 「예수교신보」에 급산읍교회를 “교회 창립된 지 3년이 되어 벌써 회개한 형제가 40~50명을 헤아리는 교회”로 보고하였다. 이후 금산에는 금성교회, 수영교회, 군북교회, 지방교회 등의 교회가 계속 설립되며 100년 역사의 기독교 복음화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성지 주변 사적지와 순례길: 천주교]
지방리 공소와 가사벌[가새벌]
진산사건 이후 이 지역에는 천주교의 교세가 잠시 주춤하였으나 지방리 일대에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그중 하나가 가새벌 교우촌이다. 가새벌은 1866년 병인박해 이전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와 살던 곳이다. 병인박해가 시작된 이래 순교한 김영오 아오스딩, 김영삼, 김춘삼 사도요한 세 분이 가새벌 출신이다. 지방리 공소는 원래 가새벌에 위치해 있었으나 1927년 가새벌과 장대울 교우들의 노력으로 현재 위치에 진산성지성당을 건립하였으며, 90년 만인 2017년 5월 29일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가사벌에는 현재 대전교구 공동사제관이 들어서 있다.
진산성지성당 후면 100m에 진산역사문화관이 있다. 진산역사문화관은 진산사건실과 진산문화실로 나누어져 진산사건과 진산면의 역사와 문화를 편리하게 관람할 수 있다.
진밭들 교우촌과 최양업 신부 일화
진산성지에서 대둔산 방향으로 약 1㎞ 인근[두지리], 긴 밭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최양업 신부의 일화가 있는 곳으로써 최양업 신부가 쓴 편지의 일부이다. “하루는 전라도 진밭들이라는 마을로 갔는데 그곳은 얼마 전부터 거의 마을 전체가 교리를 배우며 세례 준비 중이었습니다. 제가 저녁나절에 신자 몇 명에게 고해성사를 집전한 다음 아기 세례에 이어 -중략- 닭이 울 때 일어나 미사를 드릴 예정을 하고, 영세 준비를 마친 어른 15명에게 세례 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백 명이 넘는 포졸들이 마귀 때 같이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 왔습니다. 저와 몇몇 신자들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가시덤불 사이로 이리저리 해매였습니다.” 진밭들 교우촌은 진산사건 이후 스스로 성장한 신앙공동체의 대표지였다. 이때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문초를 겪는 박해를 당했다.
막현리[마근배미]
진산성지에서 대전 방향으로 2㎞ 인근,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여타 진산 지역 순교자들이 안장되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순례길
진산↔장안동〓순교자들의 흔적을 찾으려 노력했던 김진소 신부는 1970년대 부터 여러 문헌과 수많은 답사를 통해 이곳이 순교자들의 활동경로임을 밝혀내었다.
진산초등학교[진산관아]→전동성당[전주감영]〓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진산관아[현 진산초등학교]에 자수하고 전주감영[현 전동성당]으로 압송되어 참수당한 곳으로 최초의 순교터인 이곳에 1889년 5월 전동성당이 건립되었다.
전동성당[전주감영]→막현리〓두 순교자의 시신은 조정의 배려로 친척과 친지들에 의해 수습되어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이 길은 순교 후 시신으로 돌아온 침묵의 귀향길이었다.
대전교구는 2023년 5월 성지 새 성당 봉헌식과 함께 새 순례길도 개방했다. 대전광역시 서구청과 충청남도 금산군은 업무협약을 맺고 장태산 자연휴양림부터 진산성지까지 총 6.3㎞에 이르는 숲길을 정비했다.
[금산 지역의 기독교 문화발전]
앞서 서술하였듯 금산은 천주교 최초 순교지를 품은 성지이며 개신교 100년 복음의 역사를 이어온 유래없는 신앙의 고장이다. 아름다운 피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순례자들의 발길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2023년은 금산 기독교 역사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순교자의 유해가 그 먼 시간을 지나 그들의 자리에 돌아왔다는 것이 그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앙인은 기억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였다. 지금 신앙과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지난날 순교의 역사도 기억해야 한다. 과거의 희생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구원도 없다. 자유와 해방의 역사에는 희생자와 증거자의 얼굴과 이름, 이야기가 있다. 오래 전 금산 지역에 스스로 피어나 만개한 신앙의 꽃이 스스로 희생하여 다시 씨앗을 맺고 100년 전교와 복음화로 이어졌듯 기독교 최초의 역사가 보배로운 터전 금산에서 최후의 역사가 될 때까지 그 향기는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