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6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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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持忠 |
이칭/별칭 | 우용,바오로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재영 |
출생 시기/일시 | 175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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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91년 - 윤지충 제사 거부 및 신주 소각 |
몰년 시기/일시 | 1791년![]() |
추모 시기/일시 | 1914년![]() |
추모 시기/일시 | 2009년![]() |
추모 시기/일시 | 2014년![]() |
활동지 | 진산성지 -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지방리 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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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종교인 |
성별 | 남 |
[정의]
충청남도 금산 출신의 조선 후기 천주교 순교자.
[개설]
본관은 해남이고 천주교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어머니 안동 권씨와 동생 윤지헌(尹持憲)도 천주교 신자였다. 사촌지간으로 권상연(權尙然)과 정약용(丁若鏞)이 있다.
[활동 사항]
윤지충은 1759년 출생하여 1783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784년 서울 명례동에 있던 김범우(金範禹)의 집에 방문해 『천주실의』와 『칠극』을 빌려 진산으로 돌아와 두 책을 베낀 뒤 돌려주었다. 윤지충은 진산 지역에 천주교 서적을 가져오면서 동생 윤지헌과 사촌 권상연에게 천주교를 배울 것을 권하였다. 1787년 이승훈(李承薰)에게 세례를 받았다. 1790년 북경에 파견된 천주교인 윤유일(尹有一)은 주교 고베아(Gouvea)로부터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고 제사를 거부한다는 천주교의 입장을 확인 받고 돌아왔다.
1791년 어머니 안동 권씨가 사망했음에도 윤지충은 상례를 치르지 않았고 같은 동네에 거주하던 권상연도 함께 행동하였다. 이른바 진산사건은 풍문으로 시작하였다. 윤지충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을 때 어머니 안동 권씨가 사망하였다. 윤지충이 어머니의 신주를 소각하고 뒤뜰에 묻었다거나 상례를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거나 문상객을 부르지 않았다는 등의 소문이 퍼졌다. 윤지충은 권상연과 상의하여 신주를 모시지 않고 절하는 의식도 생략하였다. 소문이 외부에 퍼지면서 문상을 꺼리는 일이 발생했고 문상을 온 경우에도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
소문이 중앙 조정까지 알려지면서 정조는 당시 전라감사 정민시(鄭民始)에게 조사를 명령하였다.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은 윤지충의 집으로 찾아가 사당에 위패를 넣어두는 곳을 보고 신주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라고 지시하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피신하였으나 숙부를 대신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관아에 나아가 전라감사 정민시의 심문을 받게 되었다. 윤지충은 사대부 집안의 신주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기에 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 않아서 신주를 묻었다고 진술하였다. 윤지충은 끝까지 천주교 교리의 타당함을 주장하여 신앙을 고수하였고 결국 1791년 겨울 권상연과 함께 전북특별자치도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박해 관련 인물이다.
[묘소]
2021년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초남이성지 성역화 작업 중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무연고 분묘 중 하나가 윤지충의 묘로 확인되었다.
[상훈과 추모]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전동에 1914년 건립된 전동성당은 윤지충이 순교한 곳에 세워진 성당이다. 2009년 윤지충과 권상연을 기억하기 위한 진산성지가 조성되었으며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되었다.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