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1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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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芚山 喪輿- |
이칭/별칭 | 「대둔산 생애대」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행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경희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1년 - 「대둔산 상여바위이야기」 『금산군지』2권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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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상여바위 -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행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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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설화|암석 유래담 |
주요 등장 인물 | 동학농민군|일본군|마을 사람들 |
모티프 유형 | 의병들의 의로운 죽음|암석 유래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대둔산에 있는 상여바위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상여바위는 충청남도 금산군 대둔산 청림골 정상에 있는 바위 이름으로 장군바위라고도 불린다. 모양이 상여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며, 생애대라고도 한다. 생애는 상여의 충청도 사투리이다. 상여바위는 뒤에서 올라가면 평평하고 넓은 공간이 있고, 아래에도 넓은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동학농민운동 당시 진산 출신 동학농민군 30여 명이 숨어서 저항 활동을 하던 중 일본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채록/수집 상황]
「대둔산 상여바위이야기」는 2011년 금산군지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금산군지』2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조선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군대는 전국을 누비며 신식 무기로 동학농민군을 공격했다. 동학농민군들은 조선을 차지하려는 일본군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목숨을 걸고 무력 투쟁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연이은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쫓기게 된 진산 출신 동학군들은 충청남도 금산군 대둔산 청림골로 숨어 들게 되었다. 당시에는 동학운동을 하다가 포로로 잡히면 온 가족이 죽음을 당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깊은 골짜기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조헌(趙憲)이 젊은 시절 공부한 적이 있던 청림사가 있는 곳이어서 절 아랫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절 뒤에 위치한 바위 석굴[지금의 상여바위]에 요새를 만들고 일본군과의 전투에 대비했다.
그러나 안개 낀 어느 날 바위 뒤쪽으로 몰래 침투한 일본군의 신식 소총에 의해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잔인한 일본군은 청림사와 마을까지 불을 지르고서야 물러갔다. 그 후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은 고향을 떠날 수 없어서 절이 있었던 중봉 절터에 움집을 짓고 살았다. 그런데 비 오는 날 밤만 되면 동학농민군이 머물렀던 바위에서 상여 나가는 소리가 구슬프게 들렸다. 동학농민군과 함께 고초를 겪었던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 소리가 마치 일본군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의 장례를 치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 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여바위’, 또는 ‘장군바위’라고 불렀다.
[모티프 분석]
「대둔산 상여바위이야기」의 주요 모티프는 ‘의병들의 의로운 죽음’, ‘암석 유래’ 이다. 동학농민운동 항쟁 지역인 금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목숨 걸고 싸운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이야기이다. 여기에 동학농민군들의 영혼을 장례 치르는 듯이 상여 나가는 소리가 슬프게 들려서 ‘상여바위’라고 이름 붙인 암석 유래담과 결합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