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759 |
---|---|
한자 | 文泰瑞 |
이칭/별칭 | 문태수,문태진,문태현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병택 |
[정의]
개항기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가계]
문태서(文泰瑞)[1880~1913]는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장구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아버지는 문병현(文炳鉉)이다. 문태서의 본명은 문태현(文泰鉉)이며, 문태진(文泰珍)·문태수(文泰洙) 등으로도 불렸다.
[활동 사항]
문태서는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덕유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박동식(朴東植), 박수문, 전성보 등의 의병부대와 합세하여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부대를 ‘호남의병단’이라 칭하였으며, 문태서는 총참모 지휘장이 되었다.
문태서가 이끄는 의병부대는 1908년 1월 지금의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고창리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4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며, 2월에는 무주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때 일본군의 반격으로 체포당하였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4월 10일에는 신명선의 의병부대와 합세하여 지금의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을 습격하였으며, 4월 24일에는 장수군 계북면 지역을 공격하였다. 이어 5월 8일에 전라북도 남원 지역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에는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충청북도 영동·청산·옥천 등지로 옮겨 가며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1월에는 옥천·청산·금산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다수를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문태서는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소규모 부대를 중심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금산·보은 등지에서 여러 차례 유격전을 펼쳤다. 1912년 8월 17일 매부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일본군에 소재가 노출되어 체포당하였다. 이후 대구·서울 등으로 이송되었으며,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였다.
[묘소]
문태서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문태서는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장덕리 구천동에는 의병장문태서전승기념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