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595
한자 金侁
영어공식명칭 Kim Shin
이칭/별칭 충간(忠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문경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몰년 시기/일시 1274년 10월 3일연표보기 - 김신 사망
사당|배향지 황풍사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황풍2길 3-9[황풍리 산22]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진례[금산]
대표 관직 금자광록대부 요양성참정|추밀원부사

[정의]

충청남도 금산 출신의 고려 후기 문신이자 금산 김씨의 시조.

[개설]

김신의 자는 윤직(倫直), 호는 낙천재(樂天齋)이며, 진례현[현 충청남도 금산군] 출신이다. 원의 요양행성 평장사를 역임하였고, 고려에서는 추밀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274년(원종 15)에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할 때 좌군사가 되어 출전하였다가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났다. 1305년(충렬왕 31)에 김신의 공을 인정하여 출신지인 진례현금주(錦州)로 승격시켰다.

[가계]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은열(殷說)공의 제15세 손으로 금산[진례] 김씨의 시조이다. 『금산김씨세보(錦山金氏世譜)』에 실린 「參政公行蹟」과 「參政公事實本記」에 따르면 부리(富利) 사람이고, 안성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명량(金明亮)으로 관직이 문하성사 집현전 태학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신은 고려 종실의 먼 친척인 낭장(郎將) 왕연(王涓)의 딸과 결혼하였다. 광평공(廣平公) 왕혜(王譓)가 왕연의 노비를 탐내어 빼앗자, 김신은 장인인 왕연을 위해 소송을 걸어 되찾아왔다. 하지만 김신이 일본 원정에서 익사한 후 왕연은 그 노비를 다시 원성공주[제국대장공주]에게 바쳤다. 원성공주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그 노비들이 낳은 자식들까지 모두 빼앗았는데, 왕연이 궁궐문에 머리를 치며 애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돌려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활동 사항]

김신은 고려 고종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좌정언을 지냈다. 1260년(원종 원년) 추밀웡부사로, 1267년 원종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다. 이때 정서대원수로 원에서 공을 세워 1269년 금자광록대부 요양성참정(金紫光祿大夫 遼陽省參政)에 제수되었다. 1273년(원종 14)에는 쿠빌라이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원에 하성절사(賀聖節使)로 다녀왔다. 1274년(원종 15)에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에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할 때 좌군사(左軍使)가 되어 중군사 김방경(金方慶)과 원정을 떠났다가 10월 3일 일기도(一岐島)에서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김신의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일찍이 어머니가 왜적에게 피살되었는데, 김신이 그 뼈를 수습하여 하늘을 보며 통곡하기를 ‘이것이 우리 어머니의 뼈라면 마땅히 색이 변하리라’라고 하니, 말이 끝나기 전에 백골이 푸른색으로 변하고 하늘에 구름이 모여들어 비가 내렸다고 한다. 원 황제가 명을 내려 김신의 고향에 사당을 짓고 사중(四仲)[2월·5월·8월·11월]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상훈과 추모]

나라에서 김신의 공을 기려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성곡서원(星谷書院)과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의 죽계서원(竹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되자 후손들이 황풍사(皇風祀)를 세워 김신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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