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5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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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州 鄭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동재 |
입향지 | 경주 정씨 입향지 -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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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경주 정씨 집성지 -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 |
성씨 시조 | 지백호(智伯虎) |
입향 시조 | 정재(鄭齋) |
[정의]
지백호를 시조로 하고, 정진후를 중시조로 하며, 정재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금산군의 세거 성씨.
[개설]
경주 정씨(慶州 鄭氏) 금산군 입향조는 정재(鄭齋)이다. 고산현감으로 부임한 정재가 금산에 있는 아버지의 묘를 보살피기 위하여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로 이거하면서 후손들이 세거하였다고 한다.
[연원]
경주 정씨는 지백호(智伯虎)를 시조로 한다. 지백호는 신라 사로(斯盧) 6촌 중의 하나인 자산 진지촌(珍支村)[옛 본피부(本彼部)] 촌장이었다. 고려 시대 때 정진후(鄭珍厚)가 문과에 급제하여 병부상서 겸 군기시윤(兵部尙書 兼 軍器寺尹)을 지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정진후를 중시조로 삼고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 후손은 문헌공파(文獻公派), 양경공파(良景公派), 월성공파(月城尉派), 평장공파(平章公派) 등 네 파로 나뉘었다. 문헌공파 중 노송정(老松亭) 정지년(鄭知年)[1395~1462]의 후손이 노송정파를 형성하였다.
[입향 경위]
경주 정씨 금산군 입향조는 정인조(鄭仁祚)의 둘째 아들인 정재이다. 경주 정씨 족보에 따르면, 정재가 고산현감으로 부임하면서 금산에 있는 아버지의 묘를 돌보기 위하여 인근 지역인 지금의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로 들어와서 세거하였다고 한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정인조가 왜구와 싸우던 중 물을 마시다가 순절한 곳이 금산의 관전천(官田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인조의 후손은 교수공파와 고산공파로 나뉘는데, 정인조의 둘째 아들 정재의 후손이 고산공파, 순천에서 살고 있는 정인조의 첫째 아들 정림(鄭霖)의 후손이 교수공파이다.
[현황]
2015년 통계청에서 발간한 『인구주택총조사보고서』-성씨·본관 편에 따르면, 금산군에 살고 있는 경주 정씨는 462명이다.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에 경주 정씨 고산공파 집성촌이 있다.
[관련 유적]
경주 정씨와 관련한 유적으로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에 정인조를 배향하는 충렬사가 있다. 후손들이 정인조를 불천지위(不遷之位)로 모시다가 1979년 금산군의 지원으로 충렬사를 건립하고, 매년 음력 3월 1일 향사를 지내고 있다. 정인조의 묘와 신도비는 추부면 자부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