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422
한자 水心臺
영어공식명칭 Susimdae
분야 지리/자연 지리,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수심대길 30[곡남리 369]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행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5월 17일연표보기 - 수심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6호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수심대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현 소재지 수심대 -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수심대길 30[곡남리 369]지도보기
성격 바위
관련 인물 조헌
크기(높이,길이,둘레) 63㎝[가로]|33㎝[세로]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곡남리에 있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

[개설]

수심대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곡남리 송촌마을 표충사 뒷편에 ‘수심대(水心臺)’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이다. 수심대는 조선 시대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중봉(重峯) 조헌(趙憲)[1554~1592]과 관련된 바위이기도 하다. 조헌임진왜란 이전에 관직에서 물러나 옥천군 안읍밤티[安邑栗峙]에 후율정사(後栗精舍)라는 서실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고 후학을 양상하는 데 힘썼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참전하여 청주성을 수복하는 등 공을 세웠으며, 전라도로 진격하던 왜군을 막기 위한 금산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조헌은 옥천군에 살면서 인근인 금산 일대를 자주 왕래하였는데, 수심대가 있는 곳을 보고 후손들에게 이곳에서 살라는 뜻으로 “심천과 북수 사이가 곧 이곳이니 당당히 화를 피하고 기를 솟게 하는 어귀이다. 이 어귀는 그 땅을 안정시킬 것이니 이곳이 요지이다. 뒤에 논함이 번거롭게 끝없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삼가 없어짐이 없도록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건립 경위]

수심대로 부르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조헌복수면 곡남리 송촌마을을 지날 때 경치를 보고 감탄하여 수심대라고 칭하였다는 설이다. 조선 후기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전국 지리지인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수심대조헌이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송촌마을 앞으로 흐르는 사행천 양쪽으로 3개의 마을이 ‘마음 심(心)’ 자와 같이 위치한다고 수심대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수심대’라는 글씨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썼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위치]

금산군 복수면 곡남2리 마을 회관에서 수심대교를 건너 곡남3리 마을 회관으로 향하는 길가에 위치해 있다.

[형태]

수심대는 나무가 자라는 큰 바위 가운데 가로 63㎝, 세로 33㎝ 크기의 ‘수심대(水心臺)’라는 글씨가 한자로 새겨져 있으며, 글씨 안쪽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현황]

수심대는 1984년 5월 17일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현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수심대 앞쪽에는 ‘수심대(水心臺)’라는 글씨가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뒤쪽에는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표충사(表忠祠)’라고 불리는 조헌사당이 위치해 있다.

[의의와 평가]

수심대는 조선 시대 유학자이자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헌의 금산 지역 활동을 보여 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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