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394
한자 靑年運動
영어공식명칭 The Youth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헌주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서 전개된 청년 중심의 민족운동.

[개설]

일제는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고 조선총독부를 세우면서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를 시작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일제 식민지 하에서 다양한 방식의 항일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서도 3·1운동,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의 활발한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중에는 청년들 중심의 운동도 활발히 일어났다. 당시 청년들은 군이나 면 혹은 동리 단위로 청년수양단체를 결성한 뒤 야학·생활 개선 등과 같은 민중계몽 활동과 강연회·토론회·연극회·체육회 등과 같은 정치문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 시작은 1920년 7월에 창립된 금산청년회였다. 비슷한 단체로 1928년 2월에 창립된 금산청년동맹이 있었고, 1926년 2월에는 금산군 복수면에서 복수청년회가 창립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금산 지역의 청년운동은 1930년대 초반까지 전개되었지만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쇠퇴하다가 1933년 7월 이후부터는 자취를 감추었다.

[역사적 배경]

3·1운동 이후 일제가 무단통치를 폐기하고 이른바 문화정치를 실시하면서 조선의 각 지방에는 근대식 학교 교육을 통해 신지식을 수용한 지역 청년들에 의해 각종 청년운동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청년들은 군이나 면 혹은 동리 단위로 청년수양단체를 결성한 뒤 야학·생활 개선 등과 같은 민중계몽 활동과 강연회·토론회·연극회·체육회 등과 같은 정치문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에 활성화된 이러한 각종 인격수양운동·품성도야운동·농촌계몽운동 등은 일종의 신문화운동이었다.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서도 금산청년회, 금산기독청년면려회, 복수청년회, 금산청년동맹 등의 단체들이 지역민의 계몽과 관련된 각종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과]

1920년 7월 10일 금산 청년들의 발기로 금산청년회가 창립되었다. 출범 당시 회원은 수백 명에 달했다. 1922년 5월에는 금산청년회관이 준공되었고 신축낙성식도 거행하였다. 이후 강연회, 운동회를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1932년 4월 『중앙일보』 기사에 금산청년회 관련 기록을 마지막으로 이후의 활동상은 보이지 않는다.

금산기독청년면려회는 1920년대에 창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25년 5월에는 여자수예강습소를 설립하여 제조품 교수 강습회를 열었고, 1933년 7월 열린 제5회 정기총회에서는 농촌사업 확장과 절제운동, 전도사업 등의 안건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금산청년동맹은 1928년 2월 4일 창립되었다. 1928년 2월 20일 금산청년동맹 군북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고, 2월 25일에는 금산군 추부면에도 지부를 설치할 것을 논의하였다. 1929년 2월에는 ‘금산청년동맹 1주년 기념식’을 열기도 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탄압 등으로 위기를 맞았으며, 1933년 이후의 활동 기록은 잘 보이지 않는다.

복수청년회는 1926년 2월 금산군 복수면의 지방 유지들이 발기하여 창설된 단체였다. 1926년 3월에 2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규약 개정과 예산 등을 결의하였다. 집행위원은 정운호, 송인순, 이규희 등이었으며, 상무위원은 조희수와 이정섭 등이었다.

[결과]

1920년대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금산 지역의 청년운동은 1930년대 조선총독부 당국의 탄압으로 위기를 맞았고 그 결과 1933년 이후의 활동 기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의의와 평가]

엄혹한 식민지 시기에 충청남도 금산 지역의 조선 청년들이 자발적이며 능동적인 체육, 문화활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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