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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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自新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범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출신 인사들이 참여했던 을사오적 처단을 위해 활동한 단체.
[개설]
자신회는 1907년 2월,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하여 나철, 오기호, 이기가 중심이 되어 결성된 단체였다. 1907년 을사오적 처단 거사에는 금산과 진산 출신 인사 6명이 활동하였다.
[설립 목적]
자신회는 나철, 오기호, 이기 등이 주도하고 회원 200명으로 결성되어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계몽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기는 자신이 작성한 취지서를 통하여 “남이 새로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새로워진다”는 의미에서 단체의 이름을 ‘자신(自新)’이라고 지었다고 표명하였다. 신사상을 발휘하고 인권을 되찾아 새로운 세계를 세우는 것이 단체 설립의 목적이었다. 이를 위하여 자신회는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계몽운동을 추진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자신회 회원들은 순종의 탄생일인 1907년 3월 21일, 정부 관료들이 하례식을 하러 덕수궁으로 갈 때를 노려 을사오적을 총이나 칼로써 처단하려고 하였다. 진사였던 김동필, 전 총순(總巡) 박대하와 이홍래 등을 동참시키고, 이들을 통해 전국에서 의사(義士) 60~70명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이날 거사는 경비 강화로 실패하였다. 1907년 3월 25일 이들은 을사오적이 궁궐로 출근하는 시간을 노려 다시 거사를 시도하였지만, 경비 강화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현황]
1907년의 을사오적 처단 거사에 참여한 의사들 중에는 옥천, 회덕, 보은, 금산, 진산, 담양, 태인 출신이 많았다. 이 중에서 금산과 진산 출신도 6명에 이르렀다. 금산군 출신의 강상원은 권중현을 저격하였는데, 의병에 참여한 적이 있던 인물로 대전에서 박대하의 제의를 받아 응모하였다. 진산군 출신의 황문숙과 금산군 출신의 황성주는 서문 밖 큰 길가에서 총을 휴대하고 이완용을 저격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진산군 출신의 이경진은 법부대신 이하영을 저격하려다가 실패하였다. 금산군 출신의 이종학은 다른 의사들과 함께 대신을 요격하려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진산군 출신의 최상오는 을사오적 살해를 위해 대기하다가 실패하였다.
[의의와 평가]
금산군과 진산군 출신이 다수 참여한 자신회는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하면서 당시 국권 회복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