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3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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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愛國 啓蒙 運動 |
영어공식명칭 | The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범 |
[정의]
개항기 국권 수호를 위한 충청남도 금산 지역의 사회 운동.
[개설]
금산 지역에서의 애국계몽운동은 주로 실력양성운동으로 나타났는데, 그 방향이 하나는 교육 활동, 하나는 국채보상운동이었다.
[역사적 배경]
금산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근대화 과정이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으나, 교육 활동과 국채보상운동 만큼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늦지 않은 시기에 나타나고 있었다.
[경과]
금산 지역의 대표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는 신식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이 있다. 금산 지역에 본격적으로 학교가 설립된 것은 1907년 이후이다. 을사늑약 이후 전국의 여러 단체들이 학교 설립에 앞선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근대 교육은 재래의 유교적 가치관을 가르치는 서당 교육과는 다르게 근대적 국가의 국민을 양성한다는 취지에서 신식 학문을 가르쳤다. 정부에서 주도하는 공립 학교의 설립은 재정의 궁핍과 교육 정책의 미확립으로 인해 부진하였으나 국민적인 교육의 열풍은 높았다.
금산 지역에서도 조선 시대 이래 서당이 다수 존속하는 가운데 사립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사립 학교는 1907년 3월에 설립된 사립 금신학교로 지역 유지들에 의해서 발의되었다. 이후 기독교 신자들의 기부금으로 사립 기독심광학교가 설립되었다. 부리면에서는 귀암사숙 자리에 평촌리 백성들의 뜻을 모아 사립 명성학교가 설립되었다. 제원면에서는 제남학교, 진산면에서는 사립 취영학교가 설립되었다. 사립학교는 아니지만 집안에서 설립한 사설강습소도 다수 건립되었다.
학교 설립 운동과 함께 전국적인 애국계몽운동으로 확대된 것은 국채보상운동이었다. 한국이 일본의 부채를 갚고 경제적 예속을 탈피하고자 대구에서부터 시작된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운동이 시작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1907년 3월 금산군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자는 취지서가 발표되었다. 취지서에 응하여 이듬해 3월까지 국채보상운동의 열기가 이어졌다. 당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을 보면 다수의 유생과 관리들, 아전들, 그리고 보부상 단체에서 많이 참여하였다. 진산군에서도 따로 취지서는 발표되지 않았으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진산군주사가 운영하는 사숙과 문중이 중심이 되어 의연금이 모금되었다.
[결과]
금산군 지역의 애국계몽운동은 실력양성운동의 한 형태로서 나타났다. 그 결과 근대교육기관으로서의 근대 학교가 주요 지역에 설립되었다. 국채보상운동 또한 금산과 진산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의의와 평가]
금산 지역은 개항장 및 대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어 근대적인 사회·문화운동이 벌어지기 어려운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애국계몽운동이 학교 설립과 국채보상운동의 형태로 활발하게 진행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