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369
한자 珍山 事件
영어공식명칭 Jinsan Incident
이칭/별칭 신해박해,윤지충사건,신해진산사건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규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791년연표보기 - 진산 사건 발생
성격 천주교 박해 사건
관련 인물/단체 윤지충|권상연

[정의]

1791년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서 발생한 조선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

[개설]

18세기 후반 진산[현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에 거주하던 윤지충, 권상연 등이 천주교를 받아들여 강상죄를 범했다는 소문이 돌자 조정에서 이를 확인하고 처벌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16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활발하게 선교사업을 펼쳤다. 이들은 서양의 각종 종교서와 과학서를 번역하여 명(明), 청(淸)나라에 배포하였다. 한문으로 저술된 서양의 종교, 과학 서적은 북경을 드나들던 조선 사신단에 의해 조선 내부로 전달되었다. 따라서 17~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은 선교사들에 의해 번역된 서양의 서적을 읽을 수 있었고, 이들 중 일부는 종교서에 감명받고 신앙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1783~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최초로 세례를 받았고, 서울 수표교 인근 이벽(李檗)의 집, 남산골 명례방 김범우(金範禹)의 집 등에서 자발적인 신앙공동체가 탄생하였다. 여기에서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이존창(李存昌), 홍낙민(洪樂敏), 윤유일(尹有一), 유항검(柳恒儉) 등이 신앙으로서 천주교를 받아들여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경과]

1784년 윤지충(尹持忠)이 서울에서 천주교 서적을 진산으로 가지고 와서 베끼고 공부하였다. 윤지충은 외사촌 권상연(權尙然), 동생 윤지헌(尹持憲) 등과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으로 발전시켰다. 윤지충은 조상의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또, 모친상을 당하자 위패를 불태우고 상례를 지내지 않았다. 당시 천주교는 제사를 우상숭배, 미신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권상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상에 대한 제사나 상례를 엄격하게 지내던 조선 사회에 이들의 행동은 큰 충격을 주었다. 따라서 세간에는 이들에 대한 풍문이 돌기 시작하였고, 소문은 조정에도 들어갔다.

조정에서는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 전라감사 정민시(鄭民始)에게 진상 조사를 명령하였다. 진산군수는 윤지충권상연을 조사하였고, 그 결과 두 사람이 천주교에 빠졌으며, 천주(天主)에게 죄를 짓고 싶지 않아 신주를 땅에 묻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들은 모친상을 극진히 치뤘다고 주장하면서도 천주교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결과]

윤지충권상연은 강상죄(綱常罪)를 저질렀기 때문에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형을 당했다. 또 천주교 전파의 혐의로 권일신(權日身)이 유배형을 받았고, 강상죄가 발생했기 때문에 진산군(珍山郡)이 5년 동안 진산현(珍山縣)으로 강등되었다.

[의의와 평가]

진산 사건은 조선 사회가 천주교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천주교는 아버지와 임금도 없고, 패륜으로 강상을 어지럽히는 사악한 학문(邪學)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따라서 이후 천주교 박해 정책에 큰 영향을 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윤지충, 권상연, 권일신 등 남인 계열 인물들이 주로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남인을 이용해 노론을 견제하려 했던 정조의 정국 구상에 균열이 생겼다. 노론이 진산 사건을 빌미로 정국을 노론 우위로 바꾸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진산 사건을 남인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지 않고, 주요 인물 일부를 처형하고, 일부를 유배보내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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