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349
한자 富利縣
영어공식명칭 Burihy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지도보기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문경호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일대에 있었던 고려 시대 진례현의 속현.

[개설]

부리현(富利縣)은 원래 백제의 두시이현(豆尸伊縣), 또는 부시이(富尸伊)라고 불렀는데, 신라 경덕왕 때에 이르러 이성현(伊城縣)으로 고쳐서 진례군(進禮郡)에 소속시켰다.

고려 건국 이후에도 부리현진례현(進禮縣)의 속현(屬縣)으로 남았다가 1175년(명종 5)에 감무가 파견되었으나 1305년(충렬왕 복위 7)에 진례현지금주사로 승격되면서 다시 진례현의 속현이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 시대의 군현은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과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으로 구분되었다. 따라서 주현은 임내에 여러 개의 속현과 향, 부곡, 소 등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 지역에는 각기 실무행정을 맡는 향리들이 있어 조세와 노동력, 그리고 특산물 등을 징수하였다.

고려 시대의 부리현은 지금의 금산군 부리면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었던 속현으로 진례군의 임내에 있었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본래 백제의 진동현(珍同縣, 珍洞縣)으로, 신라 영토가 된 이후 황산군[연산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때 진례현[금산군]에 내속시켰으나 1390년(공양왕 2)에 고산군 감무가 겸하게 하였다. 1393년(태조 2) 태조의 태실이 만인산에 묻히면서 진주(珍州)로 승격하여 지사관(知事官)을 두었다.

[내용]

백제 두시이현의 치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지만 현재의 갈선산[582.2m] 일대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갈선산에는 지금도 두 개의 성터가 남아있는데 각각 옛 성터라고 전한다. 따라서 두시이현(豆尸伊縣)의 별칭인 이성현(伊城縣)이라는 이름도 이 두 개의 성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7년 8월조에 “좌평(佐平) 정무(正武)가 무리를 모아 두시원악(豆尸原嶽)에 진을 치고 당과 신라인을 노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의 두시원악부리현의 옛 지명인 두시이현으로 추정된다.

[변천]

조선 건국 이후에는 속현이 폐지되면서 부리현은 부동(富東)·부남(富南)·부서(富西)·부북(富北)의 4개 면으로 편제되었다.

1906년(고종 43) 월경지(越境地) 정리로 부동·부서·부북은 충청남도 금산군에 속하게 되었고, 부남면은 전라북도 무주군으로 이관되었다.

[의의와 평가]

부리현은 금산과 무주에 걸쳐 있었던 진례현의 속현으로 속현이 지방편제 과정에서 어떻게 통합 또는 분리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백제의 영토에서 신라의 영토로, 고려 건국 이후에는 진주와 진례, 무주로 영역이 분리되어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두시이[부시이]와 부리는 각각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백제어와 신라어로 추정되는데, 그 의미는 둘 또는 벌을 나타내는 고어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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