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347
한자 高麗 時代
영어공식명칭 Goryeo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문경호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의 고려 시대 역사와 문화.

[개설]

고려 건국 초의 금산은 현재의 금산읍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진례현(進禮縣)진산면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진동현(珍同縣)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진례현은 본래 백제의 영토였으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 진례군으로 고쳤다. 고려가 건국된 후에는 진례현으로 강등하고, 현령관을 두었으나 1305년(충렬왕 31)에 지금주사(知錦州事)로 승격시켰다.

진동현은 본래 진례현의 속현이었으나 1390년(공양왕 2)에 진례현에서 분리하여 고산현의 감무로 하여금 진동현까지 겸임하게 하였다.

[행정구역의 변천]

고려 태조는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고려에 협조한 군현은 읍격을 주(州)·부(府)로 높여 대우하고, 견훤의 편에 섰거나 고려에 끝까지 저항한 군현은 직속군이나 외관을 주둔시켜 통제하였다.

고려 건국 후 현재의 금산 일대인 진례군진례현으로 강등된 것을 보면 진례군은 고려에 크게 협조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 대에 1차로 정비된 고려의 지방제도는 현종 대에 재정비되었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이 간략하여 이 때 진례현 일대의 행정구역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 수 없지만 특이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의 행정구역이 그대로 계승된 것 같다.

진례현이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는 고려 말 1305년(충렬왕 31)이다.

이 지역 출신 김신(金侁)이 원(元)나라에 벼슬하여 요양행성 참정(遼陽行省 參政)이 되어 나라에 공이 있으므로 지금주사(知錦州事)로 승격시켰다. 7품관인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던 작은 고을에서 5품관인 지사(知事)가 파견되는 주(州)로의 승격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진례현부리현(富利縣)·청거현(淸渠縣)·주계현(朱溪縣)·무풍현(茂豊縣)·진동현(珍同縣) 등 5개 현을 속현(屬縣)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부리현은 현재의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일대, 청거현은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용담면 일대, 주계현은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적상면 일대, 무풍현은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풍면 일대, 진동현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일대이다.

이들 중 부리현, 청거현, 주계현은 통일 신라 시대 진례군이던 시기에도 속현으로 거느리고 있었던 지역이고, 무풍현과 진동현은 각각 개령군과 황산군에 속해 있던 것을 진례현에 새로 편입시킨 것이다.

한편, 현재의 진산면 일대인 진동현(珍同縣)은 본래 백제 시대부터 진동현이라고 불리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황산군의 영현(領縣)으로 예속시켰다.

고려가 건국된 후에는 황산현에서 분리되어 진례현의 속현이 되었으나 1390년에 고산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고산감무로 하여금 진동현의 감무를 겸하게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는 진동현의 별호(別號)가 옥계(玉溪)이며, 강산(犺山)이라는 속현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의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고려 시대의 치소]

진례군의 치소는 현재 금산읍 일대로 추정된다.

금산읍 인근에는 계진리 산성과 읍성이 남아있는데, 두 성의 거리는 멀지 않다. 그 중 계진리 산성은 백제~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이용되었으며, 백제 토기와 기와를 비롯하여 고려 시대 청자 기와편 등이 수습되었다. 읍성은 1389년 설미수(偰眉壽)가 주지사로 부임하여 쌓은 것이다. 설미수는 원(元)나라 고창(高昌)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하였는데, 아버지는 설손(偰遜)이며, 설장수(偰長壽)의 아우이다. 1376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왔다. 성안의 공관(公館)은 설미수의 뒤를 이어 주지사로 온 정귀진이 세웠다.

남수문(南秀文)이 지은 「영벽루기(映碧樓記)」에 따르면 정귀진이 세운 공관은 평지에 자리잡아 사방이 마을로 둘러싸여 있어 등람할 곳이 없었으므로 1428년 김위민(金爲民)이 수령으로 부임하여 영벽루를 세웠다고 한다.

진동현의 치소는 진산의 중심지에 있는 진산성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진산성에서는 백제~조선 시대에 걸치는 광범위한 시기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조에 ‘산성(山城) 옛터가 군의 북쪽 3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진산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고려 시대의 유물과 유적]

금산 지역에 남아있는 고려 유적은 대부분 산성과 사찰터이다.

백제 시대에 축조되어 고려 시대까지 이용된 산성으로는 마전리 산성[추부면 마전리], 핏재산성[금성면 마수리], 금성산성[금성면 마수리], 진산성[진산면 읍내리], 계진리 산성[금산읍 계진리], 천내리 산성[제원면 천내리], 평촌리 산성[부리면 평촌리] 등이 있다. 용문산성[군북면 두두리]은 신라 시대에 처음 축조되어 고려 시대까지 이용되었으며, 대암리 산성[금성면 대암리]은 고려 시대에 축조되어 조선 시대까지 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산읍성[금산읍 중도리]은 1389년(공양왕 원년)에 축조한 것이다.

사찰 유적으로는 추부면 장대2리 숭암에 위치한 숭암사 3층석탑이 대표적이다. 숭암사숭암저수지숭암마을 사이에 있는 사찰로 근래에 신축하였으나 경내의 3층 석탑은 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이다. 사찰 인근에는 고려 시대 기와편과 자기편 등이 노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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