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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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關防遺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윤성호 |
[정의]
고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충청남도 금산 지역 산지에 조성했던 군사적 목적의 시설.
[개설]
금산 지역은 평균고도가 250m로 충청남도에서 가장 험준한 산악군을 형성하고 있음과 동시에 금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금강과 금강에 연결되는 지천을 중심으로 천변 평야가 발달하였고, 천변을 따라서 교통로도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지정학적인 특징은 백제와 신라 간의 항쟁이 치열하게 벌어진 삼국 시대에 다양한 군사적인 목적의 시설들이 만들어 지게 된 배경이었다.
관방 시설은 일반적인 성곽과 함께 소규모 군사시설인 보루, 임시적 성격의 책, 군사용 도로, 군수시설인 군창, 통신시설인 봉수까지 광범위하게 포함하여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산성]
금산 지역에는 고려 후기 이후 평지에 설치되어 치소의 기능이 강했던 금산읍성과 함께 산지에 조성되어 방어와 행정적인 목적을 겸하였던 산성이 19개소에 달하였다. 이러한 산성 중에는 기왕에 소규모 군사시설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보루로 분류한 철마산보루, 계원봉보루 2개소의 관방유적도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보루는 둘레 300m 미만의 소규모 군사시설로 일정한 무리를 이루면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으로 정의가 되므로, 두 보루는 산성으로 분류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문헌자료를 통하여 보면, 삼국 시대 백제와 신라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진 옥천과 영동 지역이 금산 지역의 동편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금산의 탄현과 백제 멸망 직전 계백과 김유신이 최후의 전투를 벌인 논산의 황산벌을 잇는 선은 신라가 백제로 진군할 때 사용했던 주요 통로였다. 따라서 백제의 군사적인 요충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고, 이에 따라 다수의 산성을 쌓아서 운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금산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를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확인되지 않지만, 토성이나 석축성의 정연한 성곽 외에 임시적인 성격의 목책은 전투 과정에서 자주 설치되었다. 아직 금산 지역에서 이러한 목책의 흔적은 파악되지 않았지만, 향후 면밀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군사 시설]
금산 지역에서는 군창이나 군사적인 도로의 흔적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금산의 북동쪽에 위치한 옥천에서 산 능선을 따라서 구축된 군사적인 목적의 도로가 확인된 것을 감안한다면, 향후 관련 유적이 확인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관방유적 중에서 최근에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군사 통신의 기능을 가진 봉수 유적이다. 금산 지역의 봉수는 발굴조사를 통하여 체계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지는 않았으나 지표조사를 통하여 6개소의 봉수가 존재하였음이 확인되었다.
금산 지역 6개의 봉수는 금산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방향으로 조성되었다. 6개소의 봉수는 북쪽부터 추부면 요광리 매봉재의 매봉 봉수, 추부면 마전리 먹티재의 만인산 봉수, 진산면 엄정리 엄정마을에 있는 국사봉 봉수, 진산면과 금성면과 금산읍의 경계에 있는 월봉산 봉수, 금산읍의 진악산 봉수, 남이면 대양리 백암마을의 백악산 봉수가 배치되어 있다.
봉수가 체계화된 것은 조선 시대이지만, 이미 삼국 시대부터 봉수가 운영되었다는 것은 기록과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진악산 봉수와 백악산 봉수의 인근에는 백령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금산과 인접한 지역에서는 삼국 시대의 유물이 수습되는 봉수 시설도 확인된 바 있으므로, 금산 지역에서도 삼국 시대부터 산성과 연계한 봉수가 설치되었을 가능성도 열어둘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