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340
한자 古墳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고대/고대
집필자 윤성호

[정의]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 있는 고대사회의 옛 무덤들.

[개설]

금산 지역에서는 선사 시대부터 역사 시대에 이르는 많은 수의 고고유적들이 확인되었다. 그 중에서 삼국 시대에서 고려 시대까지의 금산 지역 문화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적 중의 하나가 옛 무덤, 즉 고분이다. 고분은 장례라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조성되었고, 조성 시점의 유물이 부장된다는 점에서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일종의 타임캡슐과 같은 의미를 지닌 유적이다.

금산 지역에서 확인된 역사 시대의 고분은 수당리, 상가리, 창평리, 장대리, 파초리 고분군 등이다. 이러한 고분들은 선사 시대 유적에 비하여 분포 범위가 확대되었고, 특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밀집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마을 집단 형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분들을 통하여, 금산 지역은 산악 지대가 많지만 교통로가 발달하여 선사 시대 이후로 다양한 문화의 결절지였음을 알 수 있다.

[금산의 고분]

금산 수당리 고분에서는 삼국 시대 석곽묘 12기와 석실묘 2기, 옹관묘 2기, 토광묘 1기와 통일 신라 시대 석곽묘 1기가 조사되었다. 삼국 시대 석곽묘와 석실분에서는 5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광구호, 구형호, 완 등의 5세기대 백제 토기가 주로 확인되었는데, 대가야계 장경도 함께 부장된 것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하여 수당리 일대의 집단은 대가야와 문화적 교류를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 멸망 이후에, 신라의 문화가 전파되고 나서 조성된 석곽묘는 횡구식으로 두 차례에 걸친 추가장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1973년에 발견·신고된 창평리 파괴분에서는 서부 경남 지역 소가야계 유개고배가 확인되어 대가야 뿐만 아니라 가야 지역과 광범위한 교류가 진행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6세기 전반에서 중반까지 금산 지역은 백제와 신라 간의 점이지대와 같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는데, 아직 이 시기의 명확한 고분이 확인되지는 않았다. 6세기 후반에는 신라가 본격적으로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팽창하면서, 금산 지역을 포함한 백두대간 서편에서 백제와 충돌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의 문화상을 잘 보여주는 고분은 금산 장대리 고분군이다. 총 32기의 고분에서 6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신라의 단각고배가 확인되었고, 일부 고분에서는 인화문 토기가 확인되어 7세기 이후까지 신라의 영향을 받는 집단이 지속적으로 고분을 조성하였음이 확인되었다.

한편 1973년에 파초리 파괴분에서 토기 10점이 발견·신고된 사례가 있는데, 토기는 단각고배와 부가구연장경호, 뚜껑, 완으로 장대리 고분군과 유사한 신라의 고분으로 추정되었다.

금산 창평리 유적에서는 통일 신라 시대 고분 3기가 조사된 바 있다. 이 곳에서는 석곽묘[1호분], 석실묘[2호분], 토광묘[3호분]가 각각 확인되었는데, 1, 3호분에서는 인화문 토기가 확인되어 통일 신라의 고분이 명확하지만, 2호분은 형태가 방형으로 백제계 석실분과 유사하여 향후 다른 조사 사례를 통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금산 중도리 산19-14번지 유적에서는 석곽묘 1기가 조사되었는데 유물은 수습되지 않았다. 주변에 비교할 고분도 없어서 정확한 시기를 파악하기 어려운 사례도 있었다.

[의의와 현황]

이와 같이 금산 지역에서 고분 자료의 조사와 연구가 충분히 축적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조사된 자료를 통해서도 금산 지역의 문화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금산의 고분은 역사문화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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