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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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自然- 人間- 造化- 維持- 錦山- 塔祭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성복 |
[탑신앙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탑(塔)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사찰의 부속 축조물인 ‘탑파(塔婆)’의 준말이다. 그러나 마을에서 전승되는 탑은 사찰의 불탑과는 달리 자연과 공동체의 조화로움을 위해 조영한 적석(積石) 형태의 신앙 대상물을 지칭한다. 대개 잡석을 원추형으로 쌓고 그 위에 길쭉한 머릿돌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물론 일부 마을에서는 단순한 선돌이나 장승 또는 흙으로 쌓은 둔덕을 탑으로 부르는 독특한 사례도 보인다. 요컨대 탑신앙은 적석형을 포함하여 마을에서 탑으로 호칭하는 모든 신앙 대상물을 아우르는 개념이고, 풍수지리의 목적으로 건립된 돌무더기형 조산(造山)을 아우른다.
탑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명칭을 갖고 있다. 금산을 위시한 충청도 지역에서는 할아버지탑·할머니탑, 암탑·숫탑, 안탑·바깥탑, 상탑·하탑, 수살·수살매기 등으로 불린다. 호남 지역에서는 조탑·당산이란 명칭이 주류를 이루되 전북특별자치도 무주에서는 도탐, 장수에서는 조탐이라 부르는 사례가 다수 있다. 그런가 하면 영남 지역에서는 풍수신앙의 의미가 강하게 내포된 조산·골매기라 칭하고, 제주에서는 탑 또는 방사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탑은 장승·선돌·신목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간 신앙 대상이다. 특히 금강 상류의 무주·진안·장수를 비롯, 금산·보은·옥천·영동·청원·대전, 그리고 섬진강 상류의 남원·순창 등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영남에서는 상주·문경·합천·함안 등의 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탑신앙이 보고된 바 있다. 기타 경기도와 강원도는 상대적으로 희소한 편이고, 도서 해안 역시 제주도를 제외한 곳은 매우 드물거나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금산은 우리나라 탑신앙의 보고이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탑이 분포할 뿐 아니라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 해마다 정월에 탑제를 지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비보풍수와 금산의 탑신앙]
금산의 탑신앙 기저에는 비보풍수(裨補風水) 관념이 자리한다. 비보의 사전적 의미는 ‘도와서 모자람을 채운다’는 뜻이다. 이는 지리[풍수]적 조건을 보완하는 인문적 행태를 일컫는 범주이고, 자연과 문화의 상호 보완적인 논리에서 출발한다. 지력(地力)을 보완하는 수단으로 비보 관념은 풍수설과 결합되면서 한층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비보는 세 가지의 풍수적 관념에 기초한다. 첫째는 인간이 정혈처(正穴處)를 차지하면 지적(地的) 생기(生氣)의 이득을 얻는다. 둘째, 이러한 땅의 생기는 인간에 의하여 파괴될 수도 있고 복구될 수도 있다. 셋째, 땅의 생기가 집중적으로 모인 완벽한 길지는 없으나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그 자리의 결점을 극복할 수 있다.
마을에서 나타나는 비보풍수는 크게 수구비보(水口裨補), 화기비보(火氣裨補), 지세비보(地勢裨補), 형국비보(形局裨補), 살기비보(殺氣裨補), 지명비보(地名裨補)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수구비보는 조선 시대 읍치(邑治)와 마을에서 가장 성행했던 비보풍수의 핵심이다. 수구(水口)란 물길이 용호(龍虎)[마을 어귀] 사이를 빠져나가는 지점을 일컫는 풍수상의 용어이다. 민간에서는 수구가 허(虛)하거나 열려 있으면 그곳으로 재물이 빠져나가고 마을에 재앙이 닥친다고 믿는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수구막이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비보풍수의 관점에서는 공결이 없이 둘러싸인 아늑한 지세를 길지로 본다. 따라서 지형상으로 탁 트인 수구를 닫아 주어야 좋다고 한다. 이에 근거하여 시냇물이 흘러가는 동구 밖에 울창한 숲을 조성하거나 탑을 건립하여 수구막이로 삼고, 이를 통해 땅의 생기를 회복함으로써 온갖 재앙이 미치는 것을 물리치는 것이다. 금산에서 탑신앙이 전승되는 마을은 으레 마을숲과 장승·솟대 등이 복합 양상을 이루는 것은 이중 삼중으로 수구를 막으려는 비보풍수의 관념이 투영되어 있다.
이러한 연유로 예로부터 고을을 건설하거나 촌락이 형성될 때는 수구에 해당하는 곳에 비보의 상징물을 조성, 기지(基地)의 결점을 보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안동의 옛 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 기록된 11기의 탑[조산]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마을 입구에 조영된 울창한 숲이나,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좌정한 탑·선돌은 비보풍수의 관념이 깊이 투영되어 있다.
[화재막이와 금산의 탑신앙]
화기를 진압하는 화재막이 탑은 금산을 비롯한 전국 도처에서 두루 확인되고 있다. 전통 사회에서 민가의 골간은 목재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살림집은 초가지붕이어서 화재에는 취약한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때문에 어느 한 집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인근 민가로 옮겨 붙어 마을을 잿더미로 만드는 일이 예사였다. 화재를 막기 위한 신앙의례와 주술적인 장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마을에서 화재가 빈발하는 경우 대개는 화산(火山)이 비치거나 풍수적인 결함 또는 도깨비의 불장난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이에 대한 대응 논리로 마을에서는 화기가 비친다고 여겨지는 곳에 소금단지나 물독을 묻어 화기를 제압한다. 또 마을 내에 못을 파서 화기를 막는 동시에 언제 닥칠지 모를 화재에 대비하거나, 화산이 비치는 방향에 탑, 거북이, 해태, 솟대 등을 세워 화재를 물리치기도 한다. 이처럼 화재막이 탑은 풍수설에서 화기비보(火氣裨補)의 목적에서 건립된 탑으로, 탑 속에 숯·소금단지·무쇠솥 등을 안치함으로써 화재막이의 기능을 더욱 강화하기도 한다.
금산의 화재막이 탑은 금산군 남일면 황풍리 사미실, 추부면 용지리 장암, 그리고 진산면 삼가리 삼가동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사미실의 경우 화재막이로 탑을 쌓은 것은 1920년대 중반이다. 당시 마을에서는 불이 자주 나서 근심거리가 되었다. 주민들은 언제 불이 날지 몰라 전전긍긍했고, 심지어 유사시 긴급 출동을 위해 밤에도 신발을 벗지 않고 잠자리에 들 정도였다. 사태가 이쯤 되자 관아에서도 집집마다 물동이와 쇠스랑[화재 발생 시 초가지붕을 끌어내리기 위함]을 지급하고 단속에 나섰다. 그러나 화재는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나중에 화재의 원인이 밝혀졌는데 도깨비가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불장난을 하는 것이었다. 인력으로 어쩔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된 마을 사람들이 무당에게 찾아가 물으니, “탑을 쌓고 제를 지내면 도깨비의 불장난을 물리칠 수 있다.”라고 일러 주었다. 이에 주민들이 모두 나서 동구 밖에 탑을 쌓고 탑제를 지내자 과연 더 이상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금산군 추부면 용지리 장암마을 탑 역시 도깨비의 불장난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장암마을에서는 약 170년 전에 탑을 쌓았으나 일제 강점기 관청에서 강제로 철거하여 없어졌다. 그 뒤로 마을에서 화재가 빈발하여 민가를 불태우는 일이 계속되었다. 마을에서는 대동회의를 열고 파수꾼까지 두어 교대로 망을 보았으나 불은 그칠 줄 몰랐다. 심지어 대낮에 빈집에 불이 나서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뒤늦게 화재의 진원지가 밝혀졌는데 도깨비의 불장난 때문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탑을 쌓으면서 숯과 은제 인형을 안치하고 탑제를 지내자 도깨비의 불장난은 감쪽같이 없어졌다. 당시 탑 속에 숯을 넣은 까닭은 불씨의 상징인 숯을 눌러둠으로써 화재를 물리칠 수 있다는 관념에 따른 것이다.
[행주형 지세 및 기자신앙과 탑신앙]
금산의 탑은 행주형(行舟形) 지세 및 기자신앙(祈子信仰)과 친연성이 있다. 행주형 지세란 고을이나 마을의 지세가 사람과 물건을 가득 싣고 떠나는 배의 형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세에는 배의 순항에 필요한 여러 가지 상징적인 부대시설을 갖추기 마련이다. 가령 키, 돛대, 닻, 항구 등이 좋은 예이다. 이 모두를 갖추면 크게 길하되 어느 하나만 있어도 무방하다. 만약 이들 중 어느 것도 갖추지 못하면 배는 안정을 얻지 못해 전복하든가 유실될 우려가 있다. 이 형국의 지세에는 사람과 재화가 풍성히 모이는 곳이므로 읍터를 정하면 읍의 발달과 번창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행주형 지세의 마을이나 고을에는 배가 좌초하지 않고 안전운항을 할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탑[조산]·선돌·솟대·당간 등을 세우거나 우뚝 솟은 산이나 고목·바위 등의 자연물을 돛대와 닻으로 비정함으로써 안전장치로 여기는 것이다. 행주형 지세에 건립된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 배정이 탑은 하나의 예이다.
기자신앙의 탑은 후사가 없는 가정에서 아들을 빌기 위해 탑을 건립한 사례이다. 이와 관련된 탑은 적석공덕(積石功德)을 베풀면 간절하게 소망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관념에 기초한다. 따라서 기자신앙의 탑은 한 가정이나 개인이 쌓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적석공덕의 효험을 보기 위해 탑이 건립되는 장소는 으레 마을의 입구나 공동체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공간이 된다.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비실 탑은 기자신앙의 적절한 사례이다. 이 탑은 본래 마을과는 무관하게 후사를 두지 못한 부부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부부는 집안은 부자로 살았으나 아들이 없는 것이 근심이었다. 그래서 동네 입구에 탑을 쌓고 극진하게 치성을 드리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과연 효험이 있어 아들을 낳게 되었다. 부모가 세상을 뜬 뒤에는 아들 부부가 탑을 모셨으나 광복이 될 무렵에 아들이 죽고 가세가 기울어 마을을 떠났다. 더 이상 탑을 위할 사람이 없게 되자 마을에서 신성하게 여겨 해마다 정월 초삼일 저녁에 탑제를 지내고 있다.
탑은 가장 원초적인 신앙 대상의 하나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을 신앙의 커다란 줄기를 형성하며 수호신으로 치성을 받는다. 무엇보다 탑신앙의 심층에는 무속·불교·풍수지리적인 요소가 종합적으로 용해되어 있어 한국 기층문화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