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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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이지송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에 있는 전통 사찰에 대한 개관.
[개설]
옛부터 산수가 수려하고 경치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충청남도 금산군에는 대둔산 자락을 따라 명찰이 많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현재 금산군에서 볼 수 있는 사찰은 그 수가 많지 않다. 조선 시대에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금산 지역에도 폐사가 많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초기의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산에 10개, 진산에 4개의 사찰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석천사, 만덕사는 폐사되어 사지만 남아있고 월봉사 역시 폐사된 상태로 유물만이 발굴되었다. 봉서사와 대둔사도 폐사된 상태이다. 금산군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전통 사찰은 신안사(身安寺), 보석사(寶石寺), 태고사(太古寺), 미륵사(彌勒寺) 등 4개이다.
[금산군의 불교 역사와 문화]
삼국 시대 금산군에는 백제 제15대 침류왕 원년 9월에 호승 마라난타(摩羅難陀)[인도 승려]가 중국의 진나라로부터 들어와서 불교의 전래가 비롯하였고 궁중 불교로 시작하여 도시 불교로 번져갔다. 각 고을 읍 근교에도 사찰을 지었는데 이 당시 금산 지역에는 월봉사, 보통사, 탑선사 등이 현재 금산읍 근교에 창건되어 불교 포교와 금산 지역민의 교화에 공헌하였다.
신라가 통일 후 46대 문성왕 대에 무염국사는 우리나라 불교 선종을 포교하였다. 무염은 문성왕 7년에 귀국하여 성주사에 머무르며 전국 각지에 사찰을 지었는데 이때 금산군에도 신음산 신안사와 천저산 미륵사, 서대산 서대사, 만인산 봉접사 등이 창건되었다. 헌강왕 12년에는 조구화상이 진악산에 들어와 보석사와 영천암, 원영사 등을 창건하여 교종의 열반종, 화엄종, 법성종을 포교하였고 신라 신문왕 때에 원효대사는 금산 지역에서 고행 수도하면서 대둔산에 대범사와 태고사, 안심사, 석천사 등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불교는 금산 지역민들의 정신적 양식이며 일상생활의 규범으로 문학, 운술, 도덕, 사회생활을 규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불교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전락기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영규대사는 의병을 일으켜 수백명의 승병으로 청주의 왜적을 정벌하고 우리 고장인 금산의 왜적을 평정하려다 안타깝게도 와여평(臥餘坪)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입적하였다. 이에 영규대사와 인연이 깊은 보석사 내의 의선각(毅禪閣)에 영규대사의 위패와 선사 아홉 분의 영정을 모시고 경내에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를 건립하여 기리고자 하였다. 또한 조선 시대 금산에는 태고사의 진열대사, 서대사의 법풍대사 등 덕있는 명승(名僧)이 배출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1911년 사찰령을 내려 전국의 1,300여 사찰을 31대 본산으로 만들어 행정적으로 불교에 간섭하기 시작하는데, 이 때 진악산의 보석사가 31대 본산의 하나가 되었다. 이에 일대 사찰 운영의 전권을 지니고 그 이외의 작은 사찰들을 모두 예속시켜 재정, 인사권을 전담했다. 또한 이 시기의 불교계는 서울의 각황사를 중앙포교당으로 정하고 포교에 주력하여 지방에도 포교당(布敎堂)을 건립하였는데, 금산읍 상리에 있는 불교 포교당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1945년에 광복을 맞이하여 금산 지역 불교계는 육영사업과 사회사업을 시행하여 금산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 보석사에 대자애육원을 설치하였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태고사]
태고사는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행정리 대둔산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신라 제31대 신문왕(紳文王) 때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대둔산 낙조대(大屯山 落照臺) 아래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승지(景勝地)의 일환으로 관광객의 왕래가 빈번하다. 절터를 본 원효대사가 너무 기뻐 3일 동안 춤을 추었다고 전해지고, 만해 한용운은 “태고사를 보지 않고는 천하의 명승지를 말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본래 이름은 ‘대둔암’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고려 시대에 태고화상(太古和尙)이 중창하였으며, 조선 시대에 진묵대사(震黙大師)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태고사는 창건 이후 수많은 고승과 거유를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진묵대사와 우암(尤庵) 송시열(未時烈)의 구도는 가장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산 중턱에서 태고사로 올라가는 계단 중에 바위에 자연적으로 생긴 짧은 굴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 바위 굴에는 ‘석문(石門)’이라는 암각문이 새겨져 있다.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고 전해진다.
태고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중심에 모시고 그 좌우에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모신 건물이다. 이 절에 봉안한 불상 재료는 인도의 향근목으로 발원 기도를 하면 영험이 크다 해서 여러 곳에서 신도가 모였었다. 대웅전은 본래 1,200년의 역사와 72칸의 웅장함을 자랑하던 건물이었으나 6·25전쟁 중에 불타 없어졌다. 이후 3칸 규모로 집을 지어 불상을 모셔 오다가 1976년에 무량수전, 관음전과 함께 정면 7칸, 우측 2.5칸 좌측 3칸 규모의 ㄷ자형 건물로 대웅전을 복원하였다. 복원된 현재의 대웅전은 목조 건물에 기와 지붕으로 되어있다. 대웅전은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현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7호로 지정되었다.
[통일 신라의 승려 조구와 보석사]
보석사(寶石寺)는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에 있으며, 금산읍에서 약 9㎞ 떨어진 진악산[732m]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제143호로 1993년 11월 12일 지정되었으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건축물이다.
885년(헌강왕 11)에 조구(祖丘)대사가 창건한 역사 깊은 절이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명성황후가 중창하여 원당으로 삼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전에는 500여 명의 승려가 수학할 정도로 번창했던 곳이었다고 전해 진다.
보석사는 교종의 대본산이며, 한국불교 31본산의 하나로 지난날 전라북도 불교의 이사 중추 기관이었고 현재는 충청남도 교구 산하로 되었다. ‘보석사’라는 이름은 창건 당시 절 앞산에서 채굴한 금으로 불상을 주조하였다는 데서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보석사 주위의 울창한 숲과 암석은 보석사를 지나 봉황천으로 들어가는 보석천과 어울려 대자연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입구에는 최근에 만들어진 일주간(一柱問)을 지나면 왼쪽으로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가 위치하고, 오른쪽의 남쪽 산자락에는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되는 4기의 부도가 자리 잡고 있다. 절 안에는 대웅전, 기허당, 의산각, 산신각, 진영각 등의 건물과 부속암자가 있으며 인근에는 절경의 12폭포가 있다. 특히 높이 34m, 둘레가 10.72m이며 가지의 길이가 20m 이상이 되는 1,100년 이상 된 은행나무가 존재한다.
보석사 은행나무는 조구대사가 보석사를 창건할 무렵 다섯 제자와 함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상징하는 뜻에서 은행나무 여섯 그루를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여섯 그루가 서로 합쳐져 한 그루가 되었다고 한다. 보석사에서는 매년 음력 5월 5일 단오날에 은행나무 대신제를 지내고 있다. 대신제날 은행나무에 소원을 빌면 반드시 효험이 있을 뿐 아니라 은행을 몸에 지니면 무병장수한다고 전해진다. 오랜 세월 마을 주민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나무로 민속적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자료로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금산 보석사 대웅전(寶石寺 大雄殿)은 1993년 11월 12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제143호로서 지정 및 관리되고 있는 금산의 명물과 명소이다. 보석사 대웅전은 자연석을 7겹으로 쌓아 기단을 마련한 후 덤벙주춧돌을 두고 배흘림기둥을 세웠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다포식(多包式) 건물이다. 공포는 내외 삼출목(出目)으로 팠는데, 내부로는 살미첨자의 양 측면을 한 몸으로 형성하고 파연을 초각(草刻)하였고, 첨자와 내단(內端)을 운형두공(雲形頭工)으로 처리하여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이런 요소들은 조선 후기의 건물 양식에서 나타나지만, 안팎의 출목 수가 같은 점은 조선 중기의 요소를 띠고 있다. 가구(架構)는 앞뒤의 평주(平柱) 위에 대량을 걸고 그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루(宗樑)[마룻보]를 짠 이종량(宗樑) 오가연(架緣)이 있는데, 이 종량 위에 우물천장을 깔았고, 정면 3칸에는 띠살문을 달았다.
급한 구릉에 가운데 마당을 두고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들이 ‘口’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고, 대웅전 측면에는 풍판(風板)[비바람을 막기 위하여 박공널 밑 바로 안쪽에 널판장처럼 댄 널]을 달아 두었다. 건물 안에는 가운데에 석가모니불(釋遊牟厄佛)을, 좌우에 관세음불(觀世音佛)과 대세지보살(大勢至普薩)이 각각 모셔져 있으며, 세 기(基)의 좌상 조각 수법이 섬세하고 상호가 원만하여 조선 시대 불상 가운데 최고의 것으로 평가받는다.
보석사를 소개하는 데 있어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보석사 경내에 있는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와 의선각(毅禪閣)이다.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는 승병장이 되어 나라를 구하려다 전사한 영규대사의 충혼을 기리고 있는 비이다. 임진왜란 때 영규대사[?~1592]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일 동안 통곡한 후 스스로 승병장이 되었다. 승병 수백명을 모아 관군과 더불어 청주성의 왜적을 쳤고, 이어 조헌과 함께 금산 전투에 참가하여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 일은 이후 전국적으로 승병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839년(헌종 5) 5월 금산군수 조취영이 세운 비로, 1940년 일제가 비를 보호하던 비각을 부수고 비를 묻어 놓았던 것을, 해방 후 다시 꺼내 세워 놓았다.
의선각(毅禪閣)은 의병승장 영규대사가 계룡산 갑사와 이곳 보석사를 왕래하며 수도할 때 처소로 이용하던 곳이다. 영규대사가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이후 영규대사와 인연이 깊은 보석사 의선각에 영규대사의 위패를 모셨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가 ‘의선각(毅禪閣)'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금산 보석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錦山 寶石寺 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은 보석사 대웅전에 있는 조선 후기 목조 삼존불상으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제214호로 2011년 7월 20일 지정되었다. 삼존좌상이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앉아 있는 형태를 뜻한다.
17세기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무를 깎아 형상을 만들고 금박을 하였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의 보살이 서로 정확히 대칭하도록 하였고, 보처보살보다 크게 본존 석가모니불을 표현하는 등 예배자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집중될 수 있도록 장치하였다. 삼존좌상 모두 둥글넓적한 얼굴, 반듯한 코에 반개한 눈과 입매가 살짝 올라간 입술 등이 조화를 이룬 단정한 인상을 하고 있으며, 어깨가 폭이 넓고 허리가 길며, 무릎 폭이 넓어 전체적으로 균형 있고 안정감이 있다. 중앙 본존불은 일반적인 조선 후기 석가불처럼 항마촉지인을 지었으며, 부견의를 착용하지 않고 오른쪽 가슴과 오른팔을 드러내놓고 있다. 하반신에 표현된 굴곡이 매우 깊은 옷 주름 표현에서는 조선 후기 전라도 일대에서 활동한 법령파의 법령(法靈), 혜희(慧熙), 조능(祖能)의 작품과 유사성이 엿보인다.
우협시상은 부견의(覆肩衣)와 대의를 착용한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보살상 형식이지만, 좌협시상은 배부분에 화문장식이 있고 양 무릎에는 장신구가 있는 복갑을 두르고 있다. 이런 모습은 1629년 군산 은적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과 유사하다. 부처님의 모습과 복갑을 표현한 방식은 1655년 혜희가 조성한 법주사 원통보전 목조보살좌상과도 비슷하다.
[신라의 사찰 신안사]
신안사(身安寺)는 금산군 제원면 신안리 동북쪽에 있는 해발 677m의 신음산 국사봉에서 내려온 지맥의 산록에 자리 잡고 있다.
651년(진덕여왕 5)에 승려 자장(慈藏)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583년(진평왕 5)에 무염선사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조구(祖丘)가 헌강왕[875~885] 때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보석사의 말사가 되었으며, 6·25전쟁으로 소실되었으나 곧이어 중건되었다.
‘신안사’라는 이름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에 있는 영국사(寧國寺)에서 수학할 때 이 절에 가끔 들러 유숙하였는데 주위의 경관이 산자수명하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한다. 또한 고려 때는 공민왕이 찾아와서는 몸과 마음이 쉬어가는 절이라 말할 만큼 역사적으로 유서 깊었던 절이다.
신안사의 당우로는 대광전·극락전·진향각(眞香閣)·요묵당(寥默堂) 등의 호화롭고 장엄한 건물이 즐비하였으나, 오랜 세월에 병화로 소실되어 지금은 신안사 극락전과 신안사 대광전·요사채가 남아 있다. 신안사의 마당 중심에 서 있는 칠층석탑은 금당인 극락전과 일직선상에 있어 당탑가람[법당과 탑을 갖춘 사찰]의 가람배치[전형적인 사찰 건물의 배치]를 보여준다.
불상은 10기가 봉안되어 있었으나 병화로 소실되어, 태고사(太古寺) 등으로 옮겨 봉안되었다. 현재는 5기만 남아 있으나 그 단정하고 우아한 모습은 조선 시대 불상의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사찰이 흥할 때는 3,000명의 승려가 수학하였다고 한다.
금산 신안사 대광전(身安寺 大光殿)은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제3호로 지정되었다. 대광전은 정면 좌문 11.20m, 측면 삼문 6.60m의 규모를 갖는다.
대광전은 문화유산 지정 당시 건물 앞부분이 심히 파손되었고 일부분이 기울어 있고, 부재가 대부분 부식되어 있어 불상을 봉안치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닷집을 위시한 내부 구조와 외형이 고대 양식을 지니고 있어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보수하였다고 한다.
대광전은 정면 5간, 측면 3간의 다포식 건축이지만 지붕이 맞배지붕일 뿐만 아니라 건물의 측면에 대하여서도 평절을 짜서 돌리고 홍포를 배치하였다. 공간포는 주간에 1개씩을 두었으나 사격간에서는 생략되었다. 공포의 구성은 내외가 동일한 삼출목이어서 3개의 우설은 모두 앙설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는 수설 대신 초트림을 조각한 부촌을 볼 수 있다. 건물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후면에 옥내주를 배열하고 3간에는 후불벽과 불단을 조성해서 그 상부에 닷집을 달았다. 건물 외부의 처마 밑에는 쪽마루를 시설하였다.
금산 신안사 극락전(身安寺 極樂殿)은 1985년 7월 19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극락전은 대광전과 흡사한 규모로 경내에 인접하였다. 극락전의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765년(영조 41)과 1845년(헌종 11)에 각각 중수하였다는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맞배지붕의 다포식 건축이며 측면도 평상을 짜서 돌리고 공포를 배치한 점과 공간포를 한 개씩 둔 점과 공포의 구성도 내외가 동일한 삼출목이어서 3개의 우설은 모두 앙설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점 등이 대광전과 같은 격식을 갖고 있다. 극락전 측면에는 풍판(風板)을 달아 두었으며, 기단은 사괴석(四塊石) 모쌓기를 약 4자 높이로 만들었는데, 1935년 보수하면서 이렇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로 깔고 천장은 가운데 열을 조금 높게 만든 층급천장으로, 우물반자로 짜올렸다. 옥내에는 불상과 탱화[그림으로 그려서 벽에 거는 불상] 외에 오래된 호형의 목수와 경판이 보존되고 있으나 경판은 소실되어 몇 장만을 보유하고 있다.
금산 신안사 아미타삼존불좌상(錦山 身安寺 阿彌陀三尊佛坐像)은 신안사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으며, 2007년 10월 30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본존불 좌우에 합장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로 배치한 아미타삼존불좌상이다.
고려 후기의 단아 양식을 계승하여 크기가 장대하고 위엄이 있으며, 좌우 협시보살은 세세한 장식을 배제하고 불의 등을 풍성하면서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나무로 불상의 원형을 만든 다음 그 위에 흙과 삼베를 입혀 형태를 만들었으며 마지막으로 개금을 하였다. 현존하는 고려 말기의 불상들은 대부분 독존으로 전해지는 것과 비교했을 때, 조선 전기인 16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목심 위에 흙으로 마무리한 제작 기법, 개성적인 얼굴 표현, 합장인의 손 모습 그리고 독창적인 조형성이 특징이다.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좌상은 유난히 무릎이 낮고 상반신이 길어 장대한 신체 비례를 보이는데 결가부좌 자세에서 오른쪽 다리를 풀어 앞으로 늘어뜨렸다. 편삼(偏衫) 위에 대의(大衣)를 두른 변형통견식에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복부 가까이에 둔 손 모습으로 손가락을 결하지 않은 점이 특징이다. 머리는 경계가 거의 없는 낮은 육계에 나발이 큼직한데 마치 둥근 모자를 쓴 듯 부푼 모습이다. 볼 살이 오른 방형의 얼굴은 좁은 이마와 미간, 뾰족한 콧날, 두툼한 입술로 표현되었다. 옷주름은 간략하지만 오른쪽 어깨를 덮은 대의나 가슴 위의 승각기 등 완만한 곡선미로 부드러움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얼굴 표정과 더불어 보살상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좌협시의 관음보살입상은 화염보주가 장식된 높은 보관을 쓰고 머리에는 크게 말아올린 상투머리를 하였으며 양어깨를 덮은 통견식 대의에 수평의 승각기로 아미타여래와 차별화하였다.
[금산의 천년고찰과 현재]
2007년 기준 금산 지역 사찰에 등록된 신도수는 62,000명이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당시 금산군의 인구가 58,583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결과이다. 그 이유는 태고사에 많은 타 지역 신도가 다니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금산의 천년고찰은 금산의 산수가 얼마나 수려하였음을 알게 해주는 척도이다. 대둔산, 진악산, 서대산, 만인산, 오대산이 그윽한 자태로 금산을 둘러싸고 있어 단풍이 드는 계절엔 이름에 걸맞는 비단결 같은 산수가 펼쳐진다. 이러한 명당에 원효대사를 비롯한 큰 스님들의 혜안이 천년을 이어오고 진리와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들의 수용은 금산을 지혜와 아름다움의 본고장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금산의 천년고찰들은 우리 문화의 큰 재산인 동시에 불교 대중화의 맥을 이어가며 지역민과 무릇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지혜의 본산으로써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