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12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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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映碧樓記 |
영어공식명칭 | Yeongbyeongnugi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한연숙 |
[정의]
조선 전기 문신 남수문이 충청남도 금산에 있었던 누각인 영벽루에 대해 쓴 기문.
[개설]
「영벽루기(映碧樓記)」는 경재(敬齋) 남수문(南秀文)[1408~1443]이 쓴 기문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내용이 전하고 있지만 실제 영벽루(映碧樓)와 기문(記文)은 사라지고 없다.
[구성]
영벽루는 객관(客館) 동쪽에 있었다고 전한다. 1428년(세종 10)에 김위민이 수령으로 와서 동헌을 새로 짓고 누각을 지었는데 당시 군수 이뢰(李赖)가 남수문에게 누의 이름과 기문을 의뢰하여 편액을 써 준 것에 대한 기록이 있다.
[내용]
남수문의 기에, “지금의 군은 옛날의 진례현인데, 산을 두르고 강을 띠고 있어 전라도에서 가장 궁벽한 땅이니, 실로 사방이 막혀 있는 곳이다. 고려 시대에 읍사람 중에 김신이 원나라에 벼슬하여 본국에 대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고향에 돌아온 뒤에 충렬왕이 이를 가상하게 생각하고 금주로 승격시켜 금의환향한 영광을 드러나게 해 주었으니 이로부터 드디어 이름 있는 군이 되었다. 그런데 홍무 경신년에 왜구가 불을 질러 성읍이 폐허가 되었다. 10년을 지나서 기사년에 태수 설미수 후가 주성을 쌓았고, 그 뒤에 정귀진 후가 공관을 세우니, 관이 평지에 자리 잡아 사방이 마을로 빙 둘려 있어 등람할 만한 곳이 없었다. 선덕[명나라 선종의 연호] 무신년에 김위민 선생이 수령으로 와서, 동헌을 새로 짓고 북쪽 모퉁이에다 다섯 기둥을 누각을 세웠는데, 구성이 높고 고우며 단청이 찬란하였다. 현 군수 이뢰 선생이 일을 인계하여 계속 경영하면서 옛것에 비하면 더 보태었다. 선생이 글을 나에게 보내어 누의 이름과 기문을 청하기 때문에 전에 가서 본 것을 더듬어서 편액을 영벽이라 하였다. 이는 군의 산수가 남주의 으뜸이요, 이 누각의 풍경이 더욱 기승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서대는 북쪽의 진수요, 진악은 남쪽을 가리고 있으며, 서쪽은 대둔의 여러 산들이 빙 둘러 높이 솟아 병풍처럼 가리고 있다. 거기에 금천의 물은 서쪽에서 흘러와서 누각의 뒤에 와서는 물을 끌어 소지가 되니, 산빛과 물빛이 종횡으로 짙고 푸르며, 좌우로 서로 비쳐 귀엽고 사랑스러우게 하며 누의 승경이 이에 가장 뛰어났도다. 만약 주인으로 하여금 일에 얽매인 나머지 문을 열어 정신을 화락하게 하며 산을 대하고 물에 임한다면, 열띤 것을 씻고자 들을 도모하는 데에 도움 되는 바가 어찌 많지 않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감히 이것으로 누의 이름을 짓노라” 하였다.
[특징]
조선 전기 금산군의 동헌을 신축하는 과정에 누각도 함께 지었는데, 누각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남수문이 ‘영벽루’라고 명명하였다. 「영벽루기」의 내용은 금산군을 ‘영벽(映碧)’이라고 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금산군을 둘러싼 자연 풍광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있다. 특히 내용 중에 남주(南州)의 으뜸이라고 할 정도로 조선 초부터 자연의 아름다움이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현재 「영벽루기」는 남아 있지 않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내용이 전재되어 있다. 조선 초 금산군의 위치와 동헌 건축 시기를 알 수 있고 연호 등을 표기해서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있다. 특히 금주(錦州)라는 명칭의 유래가 담겨 있어 ‘금산군’이란 명칭의 유래를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금산의 역사와 자연환경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서술되어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