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1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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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杏亭- |
영어공식명칭 | Four Monks of the Haengje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행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강혁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2년 - 「행정의 네 스님」 『여기가 금산이다』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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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행정 -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행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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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중봉 조헌|네 스님 |
모티프 유형 |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의병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행정리에서 행정의 네 스님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행정(杏亭)은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행정리 청림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살구나무 정자가 있다고 하여 살구정이 또는 살구쟁이라고도 부른다.
[채록/수집 상황]
「행정의 네 스님」은 1992년 충청남도향토문화연구소에서 발행한 최문휘의 『여기가 금산이다』 ‘행정리’면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자세한 채록 시기와 장소는 확인하기 어렵다. 『여기가 금산이다』는 설화 내용에 저자의 주관적 윤색이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내용]
조선 시대 선조 때, 나라 안에 극심한 난이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팔도를 누비던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어느 주막에서 스님 네 명을 만나게 되었다. 중봉과 네 스님은 서로 뜻이 맞아 왜적의 무리가 쳐들어올 때에는 의병을 조직하여 함께 싸울 것을 약속하였다. 중봉은 고향인 옥천으로 돌아와서 의병을 계획하였으며 네 스님은 금산 땅의 태고사로 향하는 중이었는데, 행정에서 결의를 다시 한번 약속하고 각각 묘향산, 지리산, 계룡산, 구월산으로 흩어졌다. 이후 왜적이 쳐들어왔는데, 중봉을 비롯하여 각지에 흩어진 스님들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맞서 싸웠다. 최후의 전투인 금산싸움에서는 스님들과 중봉, 영규대사(靈圭大師) 그리고 의병 700여 명이 모두 전사하는 전투로 막을 내렸다. 그들의 죽음은 나라를 위한 거룩한 희생이었다.
네 스님 가운데 묘향산에 갔던 스님은 뒤늦게 전투에 합류하였는데, 중봉과 스님 셋이 모두 죽은 뒤였다. 묘향산에서 온 스님은 먼저 스님 셋과 중봉이 칼자국으로 표시를 남긴 행정 살구나무에 와서 결의를 다졌다. 묘향산 스님은 울분 끝에 칼로 살구나무에 한일자를 맞대어 긋고 전장에 뛰어들어 몰려오는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행정리의 행정마을 살구나무에는 네 스님과 중봉이 싸움터로 나가기 전 표시한 칼자국이 크게 다섯 개가 남아 있는데, 밤중이면 칼자국에서 불이 번쩍번쩍 났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도깨비불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살구나무 칼자국에 대한 중봉과 네 스님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로는 매년 제사를 드리며 네 스님과 중봉을 추모하였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행정의 네 스님」의 주요 모티프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의병’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쳐들어왔을 때는 관군을 비롯하여 특히 의병이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금산 지역에도 중봉과 스님들을 비롯한 의병들의 활약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전설 속에 이러한 의병 모티프를 삽입함으로서 당시 금산 지역 또한 나라를 위해 힘써 싸우는 의병들이 있었음을 강조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의병을 계획한 실존 인물로 중봉 조헌을 등장시켜 이야기의 구체성과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