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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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백현덕 |
[정의]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톨릭교와 천주교 성지.
[개설]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로 순교자가 발생한 진산사건[신해박해]이 일어난 곳이다.
조선 후기, 천주교가 이 땅에 전해질 때에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들은 남인 계통의 양반들이었다. 그들은 학통뿐만 아니라 혈연과 지연으로 연결되어 그들에 의해 복음이 받아들여지고 확산되었다. 처음 복음이 전해진 지역은 서울 지역, 경기도의 양근 지역, 충청도의 내포 지역, 그리고 전주 이북의 호남 지역 등 몇 곳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천주교 성지와 순례지의 대부분이 내포와 호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한국 천주교의 시작과 부흥이 어떠했는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천주교의 시작이 외국 선교사들의 순교와 헌신으로 이루어진 여타의 종교나 종파와 달리 서학이라는 자생적 학문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금산 지역의 천주교 유입]
금산 지역에 제일 먼저 천주교가 전해진 곳은 진산이었고, 진산 장구동에서 출생한 윤지충 바오로가 사도의 역할을 하면서 천주교가 주변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윤지충은 다른 지역에서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이승훈 베드로 및 정약용 요한 형제들과 인척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학문적 교류도 있었기에 일찍 입교할 수 있었다. 윤지충은 1784년 무렵 고종사촌 정약전의 집에 갔다가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천주실의, 칠극을 빌려 고향에 돌아와 3년 동안 탐독했고 부족한 내용은 정약전에게 가르침을 받아 1787년에 이승훈으로부터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받았다.
진산의 첫 신자가 된 윤지충은 어머니 권씨와 동생 윤지헌 프란치스코, 외사촌 형 권상연 야고보 등 가족과 친지는 물론 동네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 그 외 많은 이들이 윤지충에게 가르침을 받아 입교하였는데, 전라도 고창군 무장의 최여겸 마티아, 충청도 홍주의 한덕운 토마스, 전라도 무산의 양언주와 무안의 고시윤 등이 꼽힌다.
형에게 교리를 배워 1789년에 입교한 윤지헌은 가족들과 진산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복음 선포자가 되어 논산 은진 사람 이채운에게 교리를 가르쳐주었다. 1791년 제사 문제로 윤지충이 순교하자 고산으로 피신하여 신앙공동체를 이끌어가며 많은 이들을 입교시켰다.
[조선 최초의 순교 진산사건 발생]
윤지충과 같은 마을에 살던 권상연은 윤지충이 빌려온 『천주실의』와 『칠극』을 빌려보며 교리를 익혔고, 1787년에 ‘호남의 사도’로 불리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에게 ‘야고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권상연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지만 진산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 충실히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은 윤지충과 함께한 순교 행적에서 잘 드러난다.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수용하여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조선천주교회는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조선 정부와 조상 제사 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마침내 첫 순교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진산사건 혹은 신해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은 윤지충이 자라고 복음의 씨를 뿌린 진산면 지방리[또는 막현리] 일대에서 발생하였다. 1791년 5월 ,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가 사망하였다. 평소에 ‘자신이 죽으면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지내거나 신주를 모시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윤지충은 외사촌 권상연과 상의하여 그대로 따랐다. 윤지충은 정중하게 상례를 갖추었으나 유교의 제사에서 중시하던 신주를 모시지 않고 음식도 차리지 않았다. 이 소문이 퍼지자 받아들여질 수 없는 패륜에 대하여 당색에 관계없이 전국에서 이들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둘은 체포되었다. 당시에 진산은 전라도 땅이었다. 따라서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을 거쳐 전라도 감영이 있는 전주로 압송되었다. 윤지충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장례를 치렀으므로 효의 본분을 다하였다고 항변하였고, 한번 아버지로 모신 천주를 결코 배반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은 사형 판결을 받고, 1791년 12월 8일, 전주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이는 조선천주교회가 설립된 이래 공식적으로 판결을 받아 순교한 첫 사례였다.
[진산사건 이후]
조선 시대의 진산은 전라도에 속한 군(郡)이었으나 진산사건을 계기로 1791년부터 5년간 현(縣)으로 강등되었고, 진산군수 신사원도 유배를 당하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제사 거부가 삼강오륜을 저버린 강상죄에 해당되기 때문에 지역 전체가 연좌의 벌을 받았다. 이후 진산에 살던 천주교 신자들은 산속에 숨어들어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 등 신앙의 역사를 이어갔다. 1796년 다시 군으로 회복된 진산은 이후 그 지위를 유지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금산군에 병합되어 현재의 진산면이 되었다. 금산읍에 금산본당이 설립되었고 2019년 설립 90주년을 맞이하였다.
순교가 발생한 진산은 성지로 승격되었으며 천주교 대전교구 소속으로 진산성지기념성당이 건축되었다. 진산성지성당과 금산성당의 모태가 된 가새벌교우촌은 지방리 공소, 지방리 본당 승격, 지방리 공소 환원을 거쳐 2008년 금산본당으로 부터 분리되어 진산성지성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성당 건물은 역사성과 건축적인 희소성이 인정되어 현재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관리되고 있다.
두 순교자의 시신은 고향에서 가까운 막현리 일대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오랜 박해를 받으면서 실전되어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가 2021년 전라북도 완주 초남이 성지[유항검 복자] 바우배기 일대를 성역화 하는 과정에서 유지충, 권상연, 윤지헌의 유해가 발견됨으로써 2023년 진산성지기념성당에 안치될 수 있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된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하여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