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734
한자 李鉉相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병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5년 9월 27일연표보기 - 이현상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0년 - 이현상 금산공립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0년 - 이현상 고창고등보통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5년 - 이현상 중앙고등보통학교 편입
수학 시기/일시 1928년 - 이현상 보성전문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이현상 고려공산청년단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이현상 경성트로이카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38년 - 이현상 경성콤그룹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이현상 재건 조선공산당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이현상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피선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이현상 남조선노동당 중앙상무위원 피선
활동 시기/일시 1951년 - 이현상 남한6도도당위원장회의 주재
몰년 시기/일시 1953년 9월 15일연표보기 - 이현상 사망
출생지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금산공립보통학교 -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금산로 1427[상옥리 137-1]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고창고등보통학교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교촌리
학교|수학지 중앙고등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길 164[계동 1]
학교|수학지 보성전문학교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5가 1-2]
성격 사회주의 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남조선노동당 중앙상무위원

[정의]

충청남도 금산 출신 사회주의 운동가.

[개설]

이현상(李鉉相)[1905~1953]은 지리산 일대에서 조선인민유격대[일명 남부군]라는 이름으로 빨치산 활동을 펼치다가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조선공산당운동에 뛰어들었으며, 해방 후에는 박헌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여 사회주의 세력을 이끌었다.

[활동 사항]

이현상은 1905년 9월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태어났다. 1920년 금산공립보통학교[현 금산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중퇴하였다. 이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학생 신분으로 서울 종로 단성사 앞에서 유인물을 나누어 주며 만세를 부르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6년 11월 중순 기소 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지만, 이 사건으로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이후 이현상은 고향 금산으로 잠시 내려왔다가, 1927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한인청년회에 가입하였다.

하지만 국외 독립운동이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데 아쉬움을 느낀 이현상은 다시 금산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금산학우회, 금산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학업에 뜻을 품고 1928년 4월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입학 직후 이현상은 서울 종로에 있던 조선지광사 사원 오재현의 도움을 받아 사회주의 이론 학습 단체인 학생과학연구회에 가입하여 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이현상은 학생과학연구회에 가입한 후에 제4차 조선공산당의 청년 조직인 고려공산청년단에 가입하였다. 고려공산청년단 시절 이현상은 보성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을 조직화하는 일을 맡아보았으며, 경신고등보통학교, 양정고등보통학교 등의 동맹 휴업에도 관여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 일제에 의해 제4차 조선공산당이 적발되는 사건이 벌어졌으며, 이때 이현상도 체포되어 징역 4년 형을 받았다. 함흥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를 오가며 투옥 생활을 하던 이현상은 이재유, 김상룡 등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이때 쌓은 친분을 바탕으로 1932년 11월 출옥한 후에 이재유, 김삼룡 등과 경성트로이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뛰어들었다. 경성트로이카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데 목표를 두고 활동한 조직이다. 참고로 조선공산당은 1925년에 결성되었다가 몇 차례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조직이 와해된 바 있으며, 1930년대에 접어들어 재건 운동이 전개된 바 있다. 이현상은 조직에서 노동 쟁의를 지도하는 일을 맡았으며, 중앙고등보통학교 등의 동맹 휴업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이현상은 서울여자상업학교의 동맹 휴학에 개입하다가 1933년 12월에 다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때 이현상은 1년 이상 가혹한 고문 수사를 견뎌야 하였으며, 1935년에 겨우 재판에 넘겨져 징역 4년 형을 언도받았다. 이현상이 출옥한 것은 1938년 6월의 일이다. 출옥 후 이현상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김상룡, 이관술, 정태식 등과 경성콤그룹을 만들었다. 경성콤그룹은 1939년부터 노동조합 등을 만드는 활동에 돌입하였으며, 이후 박헌영을 영입하여 본격적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이현상은 ‘인민전선부’라는 조직을 맡아 민족주의 세력과 함께 항일 세력을 구축하는 작업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경성콤그룹도 1940년 여름, 조직이 드러나 대대적인 검거 사태를 맞게 되었다. 이때 이현상은 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으며, 고문으로 인해 병을 얻어 1942년 10월 보석 처분을 받았다. 이후 신병 치료 차 덕유산 암자에 머물다가 광복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박헌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이때 이현상은 박헌영, 김무정, 최창익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현상은 1945년 12월에 열린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 통치에 관한 협의가 이루어진 직후, 찬탁 세력을 대표하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이 조선인민당, 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으로 개편될 때도 중앙상무위원 및 노동부장에 뽑히는 등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1948년에 남로당의 군사 정치 학교인 강동정치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이끌었다. 이어 1951년 5월에는 남한6도도당위원장회의를 주재하고 남한 빨치산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지리산 일대를 무대로 끈질기게 빨치산 활동을 펼치던 이현상은 1953년 9월 지리산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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