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태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708
한자 梁太容
이칭/별칭 치도,해파(海坡)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기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9년 2월 15일연표보기 - 양태용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0년 9월 15일 - 양태용 자결 시도
활동 시기/일시 1911년 9월 1일 - 양태용 일본 정부에 독립촉구선언문 발송
활동 시기/일시 1911년 9월 9일 - 양태용 각국 공사관에 독립청원서 발송
활동 시기/일시 1912년 10월 - 양태용 일본 정부에 조선 침략 항의 각서 발송
활동 시기/일시 1913년 1월 9일 - 양태용 조선총독부에 일본 제국주의 비난 문서 발송
활동 시기/일시 1913년 1월 - 양태용 납세 및 입적 거부 운동 전개
몰년 시기/일시 1937년 11월 8일연표보기 - 양태용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3년연표보기 - 양태용 대통령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양태용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7년 9월 1일 -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하옥리 남산공원 애국지사 추모비 건립
출생지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하옥리 344 지도보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3]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금산 출신 독립운동가.

[가계]

양태용(梁太容)[1879~1937]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치도, 호는 해파(海坡)이다.

[활동 사항]

양태용은 1879년 2월 15일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하옥리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든 일본은 식민지화를 위한 여러 정책을 진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1907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켰으며,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을 통해 국내 의병 대부분을 진압하였다. 동시에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열강으로부터 대한제국의 식민지화에 대한 승인을 얻어내면서 1910년 8월 한일합방을 단행하였다. 그러자 양태용은 이를 탄식하며 9월 15일 단검으로 할복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자결에 실패한 양태용은 이후 지속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1911년 9월 1일 일본 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보냈고, 9일에는 각국 공사관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하였다. 이어 1912년 10월에는 일본 정부에 조선 침략을 항의하는 각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1913년 1월 9일에는 조선총독부에 일본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문서를 발송하고, 납세와 입적을 거부하는 운동을 하였다. 1937년 11월 8일 사망하였다.

[묘소]

양태용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890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양태용은 정부로부터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997년 9월 1일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하옥리 남산공원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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