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694
한자 金周漢
이칭/별칭 김재한(金載漢)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윤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2년 1월 5일연표보기 - 김주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 - 김주한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화동학교에서 만세 시위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59년 8월 5일연표보기 - 김주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3년연표보기 - 김주한 대통령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주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마장리 767 지도보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3]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금산 출신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주한(金周漢)[1882~1959]은 1882년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마장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당시 날품팔이로 생활하고 있었다.

김주한은 1919년 4월 3일 오후 4시경,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의 사립 화동학교 교정에서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벌이고 있던 것을 목격하였다. 학교에 들어간 김주한은 학생들에게 마을 사람들과 함께 다시 만세 시위를 하자고 권유하였다. 김주한은 화동학교 학생이었던 양해관(梁海寬)에게 시위 권유장을 작성하게 한 후, 권유장을 마을 사람에게 배포하며 만세 시위에 나설 것을 권유하였다. 밤 10시경 이노봉(李老奉)의 집 앞 논두렁에서 마을 주민, 화동학교 학생 등 60명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고, 바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주한은 1919년 4월 23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총독부는 화동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 이후 학교를 폐교하고 공립 주천보통학교로 바꾸었다.

[묘소]

김주한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김주한은 1983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
  •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https://search.i815.or.kr/dictionary/mai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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