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643
한자 宋明欽
영어공식명칭 Song Myeongheum
이칭/별칭 회가(晦可),역천(櫟泉)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행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05년연표보기 - 송명흠 출생
몰년 시기/일시 1768년연표보기 - 송명흠 사망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은진
대표 관직|경력 예조참의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용강서원에 배향된 조선 후기 문신.

[개설]

송명흠은 영조대 산림으로 활동한 송준길의 현손(玄孫)으로, 송시열, 송준길, 김원행, 유계와 함께 충청남도 금산군 용강서원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가계]

송명흠의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회가(晦可), 호는 역천(櫟泉)이다. 송준길의 현손(玄孫)이며, 부친은 송요좌(宋堯佐)이다. 영조대 선공감역을 지낸 송재연(宋在淵)이 송명흠의 종질이다.

[활동 사항]

1739년(영조 15) 선정전(宣政殿)에서 경연할 때 영경연사였던 송인명이 송준길의 현손인 송명흠을 경학(經學)으로써 천거하여 공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1746년 세자의 교육을 위해 세자시강원의 자의에 제수하였지만, 실제 관직 활동은 1749년부터 시작하였다. 종부시 주부, 충청도사, 사헌부 지평, 옥과현감, 예조참의 등을 역임하였고 경연관으로서 세손[훗날의 정조]의 교육에도 참여하였다. 1763년 송명흠이 작성한 상소가 영조를 분노하게 만들어 배척당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결국에는 유배되어 1768년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송명흠은 이재(李縡)의 문인으로 임성주(任聖周), 신소(申韶), 김양행(金亮行), 송명휘(宋明輝), 송환기(宋煥箕) 등과 교유하며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를 논하였다. 송명흠의 저서로는 『역천집(櫟泉集)』이 있는데, 1805년에 그 아들 송시연(宋時淵)이 문인들과 함께 편집 간행하였다. 『역천집』에는 송명흠이 이재, 김양행, 신소 등과 학문에 관한 의견을 교환한 편지가 수록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경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기록하였다.

[묘소]

송명흠의 묘소는 원래 금산에 있었으나 1792년에 연기현 갈산리[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갈산리]로 이장하고 묘갈을 세웠다.

[상훈과 추모]

송명흠은 1803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1805년에 문원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송명흠은 중앙의 당쟁을 피해 아버지와 함께 옥천에 살면서 금산의 용강서원(龍江書院)을 출입하였는데, 이때 금산에 있던 김원행용강서원에서 강학 활동을 하였으므로 두 사람의 교유가 이루어졌다. 그러한 인연으로 함께 용강서원에 추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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