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600
한자 吉再
영어공식명칭 Gil Jae
이칭/별칭 재보(再父),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문경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53년연표보기 - 길재 출생
몰년 시기/일시 1419년연표보기 - 길재 사망
사당|배향지 성곡서원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844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청풍사 -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 264 지도보기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해평
대표 관직|경력 성균박사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성곡서원에 배향된 고려 후기 문신이자 유학자.

[개설]

길재의 본관은 해평(海平)[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고려 말의 유학자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이색, 정몽주, 권근 등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며, 조선 건국 후에는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고향인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으로 돌아가 후학을 가르쳤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으로 불리웠다. 훗날 길재의 학통은 김종직, 김굉필 등에게 계승되어 사림들의 뿌리가 되었다.

[가계]

길재의 증조부는 고려 후기에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을 지낸 길시우(吉時遇)이며, 조부는 산원동정(散員同正) 길보(吉甫)이다. 아버지는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의 지방관인 지금주사(知錦州事)를 역임한 길원진(吉元進)이며, 어머니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된 김희적(金希迪)의 딸이다.

[활동 사항]

길재는 1362년(공민왕 11) 10세가 되던 해에 냉산(冷山)에 있는 도리사(桃李寺)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8년 뒤 상산사록(商山司錄) 박분(朴賁)의 밑에서 논어와 맹자를 읽으며 성리학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이후 배움을 이어가기 위해 아버지가 벼슬을 하고 있던 개경으로 올라와 이색·정몽주·권근(權近)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374년(공민왕 23)에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한 후 1383년(우왕 9)에 사마감시에 4등으로 합격하였다. 31세가 되던 1383년(우왕 9)에 지금주사(知錦州事)인 아버지를 뵙기 위해 현재의 충청남도 금산군으로 내려왔다가 중랑장(中郞將) 신면(申勉)의 딸인 아주(鵝州) 신씨(申氏)와 혼인하였다. 금산군 부리 일대는 신면의 장원(庄園)이었다고 한다.

이듬해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무덤 옆에 여묘(廬墓)를 짓고 삼년상을 치렀다. 상을 마친 후 1386년(우왕 12), 스승인 이색과 염흥방(廉興邦)이 주관하는 과거 시험에 맹사성(孟思誠)·심온(沈溫)·조연(趙涓)·정곤(鄭坤) 등과 함께 급제하였다. 우왕은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길재에게 청주사록(淸州司錄)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고, 이방원(李芳遠)과 같은 마을에서 교유하며 학문에 몰두하였다.

1387년(우왕 13) 성균학정(成均學正)을 제수 받고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고, 1388년 12월에는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임명되었다. 위화도회군 이후 고려의 패색이 짙어지자 1390년(공양왕 2) 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갔다. 길재의 재능을 아낀 공양왕이 계림교수(鷄林敎授)와 안변교수(安邊敎授) 등의 관직을 내렸으나 응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조선 건국 후 이방원은 길재의 행적을 찾아내어 불러들이고, 봉상박사(奉常博士)를 제수하였으나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로 사양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야은집』·『야은속집』이 있으며, 1573년(선조 6)에는 5세손 길회가 흩어져 있는 시문을 모아 3권 1책의 목판본으로 『야은선생언행록』을 간행하였다.

[상훈과 추모]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과 청풍서원(淸風書院)[청풍사],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인동(仁同)의 오산서원(吳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