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421
한자 六百高地 戰鬪
영어공식명칭 Battle of the 600 Highlands
이칭/별칭 600고지 전투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윤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10월연표보기 - 육백고지 전투 발발
전개 시기/일시 1950년 11월 - 빨치산 금산군 부리면 시국대책위원회 위원장 등 살해
전개 시기/일시 1951년 8월 - 금산경찰대 남이면 일대 빨치산 사살 및 체포
종결 시기/일시 1952년 2월연표보기 - 육백고지 전투 종결
발생|시작 장소 육백고지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 지도보기
종결 장소 육백고지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빨치산|시국대책위원회|금산경찰대|육군 제11사단 13연대

[정의]

6·25전쟁 기간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600고지에서 벌어진 빨치산과 토벌대의 전투.

[역사적 배경]

1950년 9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퇴로를 차단 당한 북한군과 좌파 세력은 산간 지대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였고, 충청남도 금산군 일대의 민간인을 습격하고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백암산 600고지를 포함한 일대는 북동쪽으로는 태백산맥, 남쪽으로는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곳이어서 빨치산의 이동로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또한 육백고지가 있는 산은 붓말골, 산막골, 굴골 등으로 불리는 험하고 후미진 곳이 많아 빨치산 활동에 유리한 지형을 갖고 있었다.

[경과]

1950년 10월 5일 빨치산이 습격하여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청사가 소실되었고, 10월 7일 금산읍내를 습격하여 경찰서를 방화하고 치안대원 17명을 살해하였다. 10월 17일부터 각면 지서와 면민방위대의 활동으로 금산군 일대의 수복이 이루어졌지만, 금산군 남이면은 11월이 되어서도 아직 수복하지 못하였다. 10월 22일에는 빨치산이 금산읍을 습격하여 읍내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경찰, 치안대원 등과 전투를 벌였다.

11월에는 금산군 부리면 시국대책위원회 위원장 양중협, 후원회장 양길수, 소방대원 김태환, 면장 길문영 가족, 금융조합장 길성순 등을 살해하였고, 12월에는 남이면사무소 지서를 방화하여 강태구 면장과 직원 2명을 살해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12월 육군 제11사단 13연대가 남이면과 진안 일대의 빨치산을 공격하였다.

이후 충청남도와 전북특별자치도 지역의 빨치산에 대한 국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진행되었고, 1951년 8월 29일에는 금산경찰대 등이 중심이 되어 남이면 일대의 빨치산을 사살, 체포하였다.

1951년 10월 26일에는 4시간 동안의 치열한 육박전을 벌이면서 빨치산 소통 작전을 펼쳤다. 이후 육군 제11사단 13연대와 금산경찰대는 육백고지 일대 빨치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1952년 2월 경 빨치산 대부분을 사살하고 체포하였다.

[결과]

600고지 일대 전투로 빨치산 2,287명이 사살되었고, 1,025명이 생포되었다. 그리고 경찰 184명·군인 20명·민간인 72명 등이 희생되었다.

[의의와 평가]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600고지 일대 빨치산은 1952년 5월 경 완전히 소탕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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