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인민위원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416
한자 錦山人民委員會
영어공식명칭 Geumsan Branch of People's Committe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윤희

[정의]

1945년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이후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건국준비위원회 지부와 지방자치 조직들이 결성한 민간 자치기구.

[개설]

충청남도 금산군의 건국준비위원회 지부와 민간 자치 조직이 금산군 인민위원회로 전환되었고, 조직과 활동을 주도한 세력은 1930년대 금산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설립]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선포로 건국준비위원회 금산지부와 다른 민간 자치 조직은 인민위원회로 전환되었다.

[기구 구성]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이화천, 청년동맹 위원장에 박천수, 농민조합 위원장에 길경섭, 협동조합 금산위원장에 박찬종, 부녀동맹 위원장에 조남순 등이 활동하였다.

이화천은 1938년 금산청년동맹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길경섭도 1931년 전라북도 공산주의자협의회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적이 있는 사회주의자들이었다.

1945년 11월 13일 미군정청의 보고에 따르면, 금산인민위원회 위원은 30명, 청년동맹은 20명, 농민조합위원은 30명, 청년위원회 150명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1945년 11월 25일 개최된 중앙인민위원회 확대집행위원회에는 금산군 대표로 조기수와 김재철이 참석하였다.

[위상 변화]

1945년 11월 이후 미군정청이 인민위원회를 공산주의 계열의 조직망으로 지목하였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해방 이전 일제 치하에서 군인, 경찰, 관료를 지냈던 인물들을 등용하면서 인민위원회 활동은 크게 축소되었다. 금산인민위원회 역시 이후 활동이 정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금산이 북한군에 점령되자 인민위원회가 다시 조직되었다. 금산군 인민위원장에는 박천수의 아들인 박원준이 임명되었고, 남조선노동당 금산군당위원장에는 길재철이 임명되었다.

금산인민위원회는 북한군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였고 점령된 금산을 관리·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의의와 평가]

금산인민위원회는 일제 강점기 지방행정이 와해되고 아직 미군정청의 지방통치가 수립되기 직전 금산의 지방 행정 안정화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좌익 세력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미군정청과 협조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결국 행정자치적 성격은 크게 위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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