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의병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389
한자 開港期 義兵
영어공식명칭 The Righteous Army in the Period from the Opening of a Port to Forced Annexation by Japa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범

[정의]

1876년 개항 이후 일제에 강점되기 전까지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의병 항쟁.

[개설]

금산과 진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장은 송암 노원섭, 문태서 등이 있다. 의병 이름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금산과 진산 지역 의병의 활약상이 당시 신문 기사에서 자주 확인된다. 1907년 6월, 대전에서 근무하던 일본인 우체부가 금산 마달령에서 도적을 만나서 피살된 사건, 1907년 9월, 금산 동영동 방면에서 20여 리에 걸쳐 의병 300여 명이 있는데 점차 세가 늘어난다는 보고, 같은 달 의병이 부암리를 거쳐 점차 금산 읍내를 습격하겠다고 큰소리치는데 의병 수가 200여 명 이상에 달한다는 기사, 1907년 10월, 의병 300여 명이 금산군에 돌입하여 경무분파소와 세무서를 부수고 불질러 제반 서류가 불에 탔다는 보고, 1907년 12월, 의병 50여 명이 금산군을 습격하여 군수, 주사, 서기, 세무주사, 순사 가옥을 침입하여 관유 물품을 약탈하였다는 기사 등이 있다.

[배경]

러일전쟁 과정에 일본은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장악하였다. 러일전쟁을 끝내는 포츠머스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은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독점권을 확인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군사력으로 위협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접수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그러자 일제에 대한 저항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관료와 양반 유생들은 반대 상소를 올리고, 일부는 자결 순국하였다.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금산 지역의 집단 의병 활동]

금산과 진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 투쟁으로는 충청남도 공주 출신 의병장 송암 노원섭의 활약이 대표적이다. 노원섭은 1907~1908년에 걸쳐 활동하였는데, 금산과 안의 등지에서 적을 격파하였으나 190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았다.

금산 지역에서 활약한 또 다른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1907년 말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에서 거병한 문태서를 들 수 있다. 문태서는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의 덕유산을 근거지로 하여 함양, 거창, 장수, 무주, 진안, 임실, 금산 등지를 오가면서 60여 회에 걸쳐서 일본의 군경을 상대로 3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2월에는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습격하여 상당수의 적을 무찔렀다. 4월에는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주재소와 군청을 방화하였고, 1909년 4월에는 수백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부선 철도역인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역을 습격하여 역사를 불지르고 일본인을 납치하기도 하였다.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 이후 1911년 8월 체포되었다가 옥중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문태서 의병부대의 선봉장이었던 박동식은 금산군 인근의 용담 출신으로 1909년 체포될 때까지 부하 40여 명을 이끌고, 금산 주변의 접경지에서 일본 군경과 교전하였다. 의병 중에서 백성의 재물을 약탈한 자들은 금산, 용담, 황간, 영동 등지에서 처단하였다. 후일 체포되어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문태서 의병 진영에는 이외에도 이름 난 의병들이 많았다. 특히 금산과 진산 출신으로는 강이봉김백원이 있었다. 강이봉은 금산군 동일면 구억리 출신으로 1908년부터 문태서 의병 진영에 참여하였는데, 1909년 9월까지 금산 주변에서 의병 군수품을 모금하였다. 이원역 방화 사건에도 참여하였고, 일본인에게 군자금 등을 빼앗는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김백원은 금산군 부북면 제원리[현 제원면 제원리] 출신으로 1908년에 문태서 의병에 참여하였고, 1909년 10월까지 금산과 그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형을 받았다.

나인영과 오기호는 박제순,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는 거사를 조직하였는데, 김동필, 박대하, 이홍래 등을 동참시키고 이들을 통해 전국에서 의사(義士) 60~70여 명을 모집하였으나 거사 당일 경비가 강화되어 실패하였다. 이 거사에 가담한 의사들 출신을 보면 옥천, 회덕, 보은, 금산, 진산 등으로 금산 주변 지역 인사들이 많았고, 금산과 진산 출신이 6명이나 되었다. 권중현을 저격한 강상원은 본래 의병에 참여한 적이 있었던 인물이었고, 황문숙과 황성주는 이완용이 통과하는 것을 대기하다가 실패하였고, 이경진은 이하영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실패하였다. 이들은 모두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종학은 다른 의사와 함께 대신을 요격하려다가 진행하지 못하였고, 최상오는 대기중이다가 도주하는 무리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들은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

[금산 지역의 개별 의병 활동]

문태서 의병 이외에 독자적인 활동을 한 금산 출신 의병도 많다. 방치경은 금산군 군내면 제동리 출신으로 1909년 8월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일본인과 그에게 사역하는 한국인을 처단하고 철도 정거장을 파괴하려고 한다는 내용으로 격문을 만들어 배포하고 의병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이외에도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이름이 밝혀진 인물로는 진산과 금산에서 활약한 김명운, 금산과 용담에서 활약한 김봉조, 진산과 금산에서 활동한 김영주 등이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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