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6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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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學術 |
영어공식명칭 | Kim Haksu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박기훈 |
출생 시기/일시 | 1863년 2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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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시기/일시 | 1900년|1920년 - 김학술(金學術) 정려|입비 |
몰년 시기/일시 | 1920년![]() |
사당|배향지 | 효자 김학술 정려 -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천을리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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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김해 |
[정의]
개항기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이름났던 효자.
[가계]
본관은 김해이다. 가계는 이조판서를 지낸 백촌 김문기(金文起)의 12세손이며, 고조할아버지는 통정대부 김성재(金聖載)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김종만(金宗萬), 할아버지는 김귀상(金貴相), 아버지는 혜릉참봉(惠陵叅奉) 김정득(金正得)이다. 김학술의 아들은 김만식(金滿植)이다.
[활동 사항]
부모를 섬김에 항상 지극히 하고 부모의 몸을 편하게 해드렸으며, 입에 맞는 음식을 드렸다. 몇 가지 설화가 전하는데, 부모가 병환이 있을 때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소생시켰고, 우연히 동삼을 얻어 부모의 수명을 연장시켰다고 전해진다. 또한 부모가 돌아가신 후 시묘살이 3년 동안 호랑이가 와서 호위하였으며, 묘 앞에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형제의 우애가 두텁고 가문이 화목하여 주위에서 칭찬을 많이 했으며 농업을 업으로 삼고 자손을 가르치며 사업에 힘써 인근 마을에서 모범으로 삼았다.
김학술의 가계와 활동에 대한 기술의 근거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근현대인물자료에 있는 내용인데, 『조선신사보감』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김학술의 이름 한자가 ‘金學述’로 기재되어 있어, 본 항목명의 ‘金學術’과는 다르다. 서로 다른 전승과 기록 때문에 한자 표기에 이설(異說)이 발생하였을 수 있다.
[학문과 저술]
일찍이 한문을 수학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해 김씨 족보에 의하면 김학술의 효행이 금산군에서 소문났고, 사림이 한 목소리로 조정에 천거하여 명정을 받아 정려를 건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덕행 포상금 10원을 받았다. 김학술이 세상을 떠난 해인 1920년 금산군의 사림들이 정려 안에 효행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