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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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誠之 |
영어공식명칭 | Yang Seongji |
이칭/별칭 | 순부(純夫),눌재(訥齋),송파(松坡),남원군(南原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재영 |
출생 시기/일시 | 14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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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41년 - 양성지 진사시, 생원시 합격 및 과거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42년 - 양성지 집현전 부수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55년 - 양성지 원종공신 2등 녹훈 |
활동 시기/일시 | 1469년 - 양성지 공조판서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71년 - 양성지 좌리공신 녹훈, 남원군 책봉 |
활동 시기/일시 | 1481년 - 양성지 문신 정시 장원 |
몰년 시기/일시 | 1482년![]() |
추모 시기/일시 | 1922년 - 양성지 구암사 배향 |
묘소|단소 | 양성지 묘 -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대포리 산32-2 |
사당|배향지 | 귀암사 -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평촌리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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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남원 |
대표 관직|경력 | 공조판서 |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구암사에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개설]
양성지는 본관이 남원이며,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 또는 송파(松坡)인데, 족보에 따르면 고려 전기 남원의 향리를 지낸 양능양(梁能讓)의 후손이라고 한다.
[가계]
증조부는 봉익대부 판도판서(版圖判書) 양우(梁祐)이고 조부는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양석륭(梁碩隆)으로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중훈대부 예빈시윤 양구주(梁九疇)이며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 전주부윤 권담(權湛)의 딸이다. 부인은 원주 변씨 호군 변상근(邊尙覲)의 딸이다.
[활동 사항]
1415년 출생하여 1441년에 진사·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경창부승(慶昌府丞), 성균관 주부를 거쳐 1442년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이후 사간원 좌정언과 집현전 직제학을 지냈다. 춘추관 기사관·기주관, 고려사 수사관을 겸직하여 『고려사(高麗史)』를 다시 편찬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1449년 평안도와 함길도의 변경 개척을 위해 진행되던 축성(築城)을 중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고 국방과 관련한 논의를 건의하기도 하였다. 1451년에는 국경 지대 뿐만 아니라 전 국토의 방어 대책에 관한 상소를 올린 바 있으며 1453년에는 「조선도도(朝鮮都圖)」·「팔도각도(八道各圖)」 등 지도를 만들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뒤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올랐으며 1459년 『명황계감(明皇誡鑑)』을 번역하고 『의방유취(醫方類聚)』를 교열하였다. 1460년에는 『손자주해』를 교정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463년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에 참여하였고 홍문관(弘文館)의 설치를 건의해 받아들여졌고 양성지가 제학(提學)이 되었다. 1467년에는 『해동성씨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북방의 방어책을 상소하였다. 1469년 『세조실록』 편찬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1481년 문신(文臣) 정시(庭試)에 장원이 되어 숭정대부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관력을 마감하였고 이듬해인 1482년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경학, 사학, 문학, 병법, 지리, 의학, 음악, 농법 등 양성지의 학문 영역은 넓고 다채로웠으며 특히 사학, 지리학, 병법에 큰 관심을 두었다. 양성지의 저술은 약 30여 종이 있는데 대부분 단독 저술이 아니며, 단독 저술이더라도 왕명에 의해 편찬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사서로는 『고려사』「지리지」,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치평요람』 등이 대표적이며 지리서 및 지도로는 『동국여지승람』, 『팔도지리지』 등이 대표적이다. 문집으로는 1791년 간행된 『눌재집(訥齋集)』이 전한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대포리 산32-2에 위치한다.
[상훈과 추모]
시호(諡號)는 문양(文襄)이다.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평촌리에 위치한 구암사(龜岩祠)에 배향되었다. 양성지의 6세손인 양응해(梁應海)가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구암사숙(龜巖私塾)을 열었다. 1922년 구암사숙 터에 구암사를 건립하여 배향하였다. 구암사에는 양성지의 행적과 공훈을 새긴 눌재양선생묘비(訥齋梁先生廟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