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6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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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稱 |
영어공식명칭 | Kim Ching |
분야 | 종교/유교,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황재영 |
[정의]
충청남도 금산 출신의 조선 전기 효자.
[개설]
김칭의 효행 및 중종·인종에 대한 심상(心喪)은 금산군의 인물에 관하여 담고 있는 읍지(邑誌)뿐 아니라 『중종실록』, 『명종실록』,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김칭의 정려가 위치한 지역의 ‘효자평(孝子坪)’이라는 지명도 김칭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활동 사항]
중종[재위 1506~1544] 때 전라도관찰사가 전라도에서 효행이 뛰어난 인물로서 김칭을 선발·추천하였고, 상으로 관직을 받을 사람 중 하나로 거론되었다. 부모가 생존할 때 마음을 다해 봉양하였고, 20세에 어머니가 병에 들자 똥을 맛보았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염습(斂襲), 빈소(殯所), 제사를 모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랐으며,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며 죽만 먹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사망하였을 때는 나이가 60세였음에도 친히 밥을 지어 먹으며 어머니의 상사(喪事) 때와 똑같이 하였으며 옷을 벗지 않고 자면서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상복을 벗은 지 9년이 지나도록 상을 당했을 때처럼 삭망제사(朔望祭祀)를 올렸다.
김칭이 사망한 뒤 1561년(명종 16)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정문(旌門)을 건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전라감사 박충원(朴忠元)은 김칭이 부모에게 효도하였음은 물론이고 중종과 인종이 사망한 뒤 상복은 입지 않았지만 근신하는 심상(心喪)을 3년 간 지속하였음을 보고하였다. 명종은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고 아들이 있다면 상으로 벼슬을 줄 것을 명하였다.
[상훈과 추모]
효자 김칭 정려는 본래 금산읍 동쪽 성문 밖에 세워졌으나 1879년 큰 장마로 정려가 유실되었고 현판이 발견된 곳에 후손들이 다시 세운 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음지1리에 위치하며 전면에 ‘순효각(純孝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려 안에는 1625년 새겨진 구 명정현판과 1954년 후손들이 정려를 중수하면서 새로 만든 신 명정현판이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