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양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574
한자 南原 梁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동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세거|집성지 남원 양씨 집성지 -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평촌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양을나(梁乙那)
입향 시조 양우(梁佑)

[정의]

양을나를 시조로 하고, 양우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금산군의 세거 성씨.

[개설]

남원 양씨(南原 梁氏) 금산군 입향조는 양우(梁佑)이다. 양우는 임진왜란 때 왜적을 토벌하는 공을 세워 호조좌랑에 증직된 양제(梁濟)[1550~1593]의 할아버지이다. 양제는 금산의 사족인 해평 길씨(海平吉氏) 길수온(吉守溫)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황진(黃進)과 함께 왜적을 토벌하는 전적을 세웠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촉석루에서 남강에 투신 자결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증직되었고 충민사(忠愍祠)와 창열사(彰烈祠)에 배향되었다. 금산군 부리면 평촌리에 남원 양씨 집성촌이 있으며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1414~1482]를 모신 사당인 귀암사(龜巖祠)[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가 있다.

[연원]

제주도에서 탐라국을 세웠다고 전하는 양을나(梁乙那)의 후손 양탕(良宕)이 광순사로 신라에 입국한 후 내물왕(奈勿王)으로부터 성주·왕자의 작호를 받으면서 성씨 ‘양(良)’을 ‘양(梁)’으로 고쳤다. 이후 757년(경덕왕 16) 양우량(梁友諒)이 신라 왕실에 공을 세워 ‘남원부 백(伯)’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남원을 본관으로 하고 제주 양씨에서 분적하였는데, 병부공파와 예성군파, 청주파, 대방군파, 용성군파, 장영공파로 계파가 나뉘어져 있다.

[입향 경위]

양우가 반남 박씨(潘南 朴氏) 박호의 딸과 혼인한 후 처향인 금산군 남일면 마장리로 이거하면서 남원 양씨 후손들이 집성촌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현황]

2015년 통계청에서 발간한 『인구주택총조사보고서』-성씨·본관 편에 따르면, 금산군에 살고 있는 남원 양씨는 1,001명이다. 금산군 부리면 평촌리 등에 남원 양씨 집성촌이 있다.

[관련 유적]

양성지를 모시는 사당인 귀암사[구암사]는 1821년(순조 21) 귀암사숙이 있던 자리에 건립되었다. 귀암사숙은 양성지의 6세손 양응해가 금산 지역에 정착한 후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만든 곳이다. 귀암사에서는 매년 9월 9일 제향을 올린다. 귀암사에는 사당이 건립되었던 당시 귀암사를 출입하였던 유림들이 기록한 『구암사청금록(龜巖祠靑衿錄)』이 보관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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