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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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영어공식명칭 | The Korean War |
이칭/별칭 | 한국전쟁,6·25 동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윤희 |
[정의]
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 기간에 벌어졌던 충청남도 금산군의 상황.
[경과]
충청남도 금산군이 6·25전쟁의 영향을 입은 것은 1950년 7월 20일 대전이 북한군에 함락되면서 피난민이 금산군에 몰려들면서부터였다. 경찰은 후퇴하면서 충청남도 금산군의 보도연맹원이었던 길병수 등을 옹박골에서 학살하였고, 북한군이 남하하면서 현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지삼티에서 경찰과 북한군이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다.
7월 24일 북한군이 충청남도 금산군에 들어왔다. 북한군은 충청남도 금산군을 장악하고 통치하기 위하여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금산군 인민위원장에 박원준, 내무서장에는 금산군 청년동맹위원장을 지냈던 박천수가 임명되었다. 남조선노동당 금산군당위원장은 길재철이었다. 북한군은 반동분자 숙청, 토지 분배 등을 실시하고 제원면에 야영 훈련소를 설치하고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1950년 9월 이후 추수기에는 수매사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벼이삭과 논두령의 콩알까지 거둬들였다. 소위 조국보위부에서는 집집마다 성금과 물품을 강요하였고, 정치보위부에서는 마을회관에 주민들을 소집하여 정치교육을 시켰다. 밤에는 방공호 파기, 낮에는 군수 물자 수송 등 주민의 노동력 착취가 진행되었다.
1950년 9월 28일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9월 30일 충청남도 금산군에도 유엔군의 폭격이 이루어졌다. 10월에 북한군이 금산군에서 철수하면서 국민부 부위원장이었던 길응대를 비롯해 경찰가족 등 우익인사들을 처형하였다.
한편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과 좌익 세력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였고, 지리산과 인접한 충청남도 금산군도 빨치산의 습격이 자주 발생하였다. 국군과 빨치산은 1년간 600고지를 두고 전투를 벌였고, 1952년 2월에 빨치산을 거의 소탕하였다.
[결과]
북한군이 금산 지역을 점령한 75일 동안 100여명의 주민이 학살되거나 전주감옥으로 끌려갔다. 또한 육백고지 전투에서 빨치산 2,287명이 사살되었고, 1,025명이 체포되었다. 경찰 184명, 군인 20명, 민간인 72명 등이 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