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립대학 설립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393
한자 民立大學 設立運動
영어공식명칭 A Campaign to Establish a Private University
분야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헌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실력 양성 운동
관련 인물/단체 조선교육협회|조선청년연합회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전개되었던 조선인 주도의 대학 설립운동.

[개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통치방식을 변경하자, 조선인 민족지도자들이 실력 양성 운동의 일환으로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22년 경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충청남도 금산군에도 영향을 주었다. 다만 운동 내부의 분열과 일제의 탄압에 의해 1924년경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역사적 배경]

1910년대 무단통치 하의 조선인들은 제대로 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조선인들이 입학 가능한 대학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으로 인해 일제 통치방식의 변화가 생겼고 이에 조선인들이 진학할 수 있는 대학을 만들자는 여론도 생겼다. 이런 흐름에서 1920년 6월 경에 조선인들의 민립대학 설립에 관한 논의가 촉발되었다. 당시 한규설과 이상재, 윤치소를 비롯한 91명의 발기인들이 ‘조선교육협회 발기회’를 개최하면서 민립대학설립이 결의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총독부가 대학 설립 인가를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1922년 1월까지도 진행되지 못하였다.

1922년 2월 경 2차 조선교육령이 개정되고 조선교육협회가 인가되자 비로소 민립대학 설립 문제가 『동아일보』 등의 언론을 통해 공론화되기 시작하였다.

[경과]

언론을 통해 공론화가 시작된 민립대학 설립 논의는 조선교육협회를 필두로 동아일보와 조선청년연합회가 협력하여 1922년 11월 ‘민립대학 기성준비회’가 조직되면서 민립대학 설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민립대학 기성준비회는 기독교계와 흥사단계, 천도교계와 불교계 인사들이 골고루 참여하였음은 물론 사회주의계 인물들과 조선인 유력자들도 참여하였던 범민족적 단체였다. 이 중에서 흥사단 계열은 1923년 이후에 지방부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각 지역 유력자들도 대거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지방 자문기구 및 지방 행정 조직에 속해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통해 지역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금산 지역이 소속된 충청남도 14군에서는 총 13개의 민립대학 기성준비회가 활동하였고 발기인 수는 62명이었다. 발기인들의 성향은 62명 중 성향을 정확히 알기 힘든 36명을 제외하고 민족주의계가 8명, 유력자집단이 18명이었다.

[결과]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관변 유력자 집단의 유입으로 인한 운동의 성격 변화, 운동 참여 세력의 다수 이탈, 불투명한 회계로 인한 운동 내부의 분열, 기근과 수해 발생 등의 자연재해로 인한 모금액 전용, 관변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으로 인한 수요 감소 등으로 점차 쇠퇴하였다.

아울러 조선총독부가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민립대학 기성회 인사들을 감시하고 그들의 지방강연을 중지시키고 청중을 해산시키는 등의 탄압까지 자행하면서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1924년 경에 좌절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교육에 의한 실력 양성 운동과 문화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아울러 민립대학 건설운동은 일제를 자극하여 경성제국대학 설립의 촉진제 구실을 하였다. 또한 이후에 전개된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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