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2003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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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光星 事件 |
영어공식명칭 | Lee Gwang-sung's Rebellion Cas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금산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규완 |
[정의]
1671년 금산의 좌수 이광성이 무리 약 50명을 모아 관아를 털고 도적질을 하다가 반역으로 규정되어 처형당한 사건.
[개설]
1671년(현종 12) 금산의 좌수(座首) 이자 유지였던 이광성(李光星)이 세력을 모아 관가를 공격할 것을 모의했다가 발각되어 관련자 50명 중 39명이 처형당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1670년에서 1671년 조선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기근이 발생하였다. 가뭄, 홍수, 풍해(風害), 충해(蟲害) 등 다양한 자연 재해로 인해 흉년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 1670년이 경술년(庚戌年)이고, 1671년이 신해년(辛亥年)이기 때문에 이를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이라 부른다. 이 시기는 조선 전역의 민심이 흉흉해져서, 살인, 강도가 빈번하였고, 추위와 굶주림을 모면하기 위한 도둑질이 만연하였다. 조선 조정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 진휼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대동법 확대 시행에 힘썼지만, 사회에 불만을 가진 세력은 점점 확산되었다. 이러한 사회 불만 세력들 중 일부는 역모세력으로 변화하는 경우도 많았다.
[경과]
이광성은 금산의 좌수였다. 좌수는 향촌 자치기구인 향청(鄕廳)의 우두머리로, 금산 지역의 유지였다. 이러한 지위에 있던 이광성이 아우 이문성(李文星), 이두성(李斗星), 교생(校生) 우명침(禹明侵), 장관(將官) 김영일(金英逸) 등과 모의하고, 도둑질을 하기 위해 무리 50여 명을 모았다. 이들은 용담현(龍潭縣)에서 군기(軍器)를 빼앗았고, 덕유산(德裕山) 속에 진을 치고 웅거하며 세력을 키웠다. 또 이들은 무주 적상산성 서창의 향곡을 노리고 관가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동태는 금산의 아전 황우룡(黃雨龍)과 황우룡의 사위 권립(權立)이 관가에 고하면서 금산군수 이정(李晸)의 귀에 들어갔다. 이정은 여러 책모로 결국 이들 50여 명을 사로잡아 심문하여 42명의 자복을 받았다.
[결과]
조정에서는 이들의 처리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영의정 허적(許積), 예조참판 김만기(金萬基), 공조판서 유혁연(柳赫然) 등은 이들이 보통 강도가 아니기 때문에 우두머리와 졸개 모두 효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좌의정 정치화(鄭致和)는 이들이 흉악하긴 하지만, 40여명을 한꺼번에 사형에 처하는 것은 조정의 덕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현종은 우두머리 5명 외에는 다시 한번 심문하여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라고 명했고, 그 결과 39명이 사형에 처해지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 되었다.
[의의와 평가]
17세기 향촌내 저항 세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인 한편, 사회 변혁 세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의 저항 활동은 약탈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사회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고,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양반 중심의 세력화였기 때문에 농민과 결탁할 수 없었고, 지속성을 갖기도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