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200358
한자 邑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금산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규완

[정의]

조선 시대 충청남도 금산 지역의 군사와 행정의 중심지 기능을 했던 성곽.

[개설]

읍성이란 지방 군현에서 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내부에 관아와 병영 등이 위치하여 군사·행정의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던 성곽이었다.

금산읍성도 기본적으로 금산군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것으로 현재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했으며, 흙으로 쌓았다고 전해진다. 다만 유물, 유적 등 현재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 연대 등을 추정할 수 없다. 1389년(공양왕 원년) 지주사(知州事) 설미수(偰眉壽)가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어 14세기 말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금산의 읍성]

조선 시대 금산 지역의 읍성과 관련된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금산군읍지(錦山郡邑誌)』 등의 기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금산군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금산읍성의 모습은 1530년(중종 25)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타난다. 금산읍성은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1천 45자, 높이는 8자, 4개의 샘이 있었다고 하였다. 1656년(효종 7) 편찬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서는 흙으로 쌓았으며 1,045척이고, 고려 말에 쌓은 것인데 지금은 모두 허물어졌다고 했으며, 1792년(정조 16) 편찬된 『금산군읍지(錦山郡邑誌)』에서는 둘레가 1,405척, 높이가 8척, 우물이 4개 있으며, 임진왜란 때 무너지고 지금은 터만 남았다고 하였다. 19세기 편찬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1389년(공양왕 원년)에 지주사 설미수(偰眉壽)가 쌓았으며 둘레가 1,045자이고, 샘이 4개였다고 하였다. 1930년대 제작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서는 토성인데 둘레가 1,405척, 높이가 8척, 안에 4군데 우물이 있으며, 임진왜란 뒤에 무너지고 그 터만 남아 있다고 하였다. 이를 종합하면 금산읍성은 1389년 설미수가 쌓았으며, 둘레는 1,045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405척이란 표현은 앞서의 읍지 등을 참고하여 기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기일 것이다. 높이는 8척, 우물이 4개 있었으며, 임진왜란 때 읍성이 파괴된 후 다시 축성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금산읍 시내 한가운데 위치했으며, 북쪽으로 현재 교육청에서 삼거리, 서쪽으로는 현재 군수관사에서 중앙극장, 동쪽으로는 중앙극장에서 교육청을 연결하는 사각의 토성이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주택과 관공서가 위치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금산군지』에 따르면 금산초등학교 뒤에 성터가 남아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확인할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금산 지역에 설치된 읍성은 군현의 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지방통치를 위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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